마을은 하나의 리듬으로 숨 쉬었다
박경리 < 토지 1권>
추석 즈음이면 생각나는 소설의 첫머리가 있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식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떼들아!"
극성스럽게 새를 쫓던 할망구는 와삭와삭 풀발이 선 출입옷으로 갈아입고 타작마당에서 굿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추석은 마을의 남녀노유,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까지 포식의 날인가 보다.
- 박경리, 토지 1권, 나남출판사-
박경리 장편소설 토지의 대서사는 1897년 한가위 풍경으로 시작한다. 씨름과 굿놀이로 마을 전체가 들썩이고,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웃고 먹고 떠들었다. 까치들, 아이들, 어른들, 심지어 강아지, 돼지, 소나 말, 새떼, 쥐새끼까지 축제인 날. 삶의 무게와 기쁨이 함께 어우러진, 진짜 ‘살아있는 명절’이었다. 그 시절의 한가위에는 자연과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나도 무명옷을 입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 송편을 물고 기뻐 날뛰며 동네를쏘다니고 싶었다.
긴 추석연휴의 시작이다. 하루는 차례준비를 위한 추석장을 보고, 다음날 전을 부치고, 추석 하루 전날은 나물과 생선을 만든다. 추석 당일 아침 차례상을 차리기 위해 꼬박 사흘을 준비하는 셈이다. 시어머니는 한 달 전부터 아침 어시장을 드나들며 차례상에 올릴 생선을 모으곤 했다. 바람 좋은 날을 골라 손질하고 말리고, 다시 냉장고 깊숙이 넣어두던 그 손길엔 오랜 세월의 질서가 배어 있었다. 나는 이제 그 정성을 조금은 이해한다.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증거라는 것을. 내게 추석은 형식보다 마음의 의례에 가깝다. 조상 앞의 절보다, 식탁에 둘러앉은 얼굴들이 더 소중하다. 손끝에 기름이 묻고 냄비에서 김이 오를 때, 나는 삶이 여전히 따뜻하다는 걸 느낀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서로의 이야기가 오가고, 웃음이 있는 밥상이면 된다. 그게 나에게는 가장 ‘제대로 된 명절’이다. 토지의 한가위처럼, 고단함 속에서도 흥이 있고, 일상 속에서도 생명이 숨 쉬는 그런 날이면 족하다.
요즘의 추석은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 명절대이동’ 대신 ‘명절 대탈출’이라는 말이 익숙해졌고, 뉴스에서는 ‘추캉스’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올해도 국내 여행 수요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휴가 길면 해외 항공권이 가장 먼저 매진되고, 이제 고속도로보다 공항이 더 붐빈다. 재래시장은 한산해졌고, 대형마트와 온라인몰의 ‘완제품 명절 세트’가 불티나게 팔린다. 전 부치기 대신 배달주문, 송편 빚기 대신 냉동포장. 이제는 손 한 번 대지 않아도 추석상을 차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올해 차례를 지내겠다는 가정은 10곳 중 4곳뿐이었다. 나머지는 간소화하거나 생략한다고 한다. 명절 대신 여행, 휴식, 자유를 택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이제 명절은 ‘쉼’의 이름으로 불린다.
젊은 시절의 나도 명절을 벗어나고 싶었다. 명절이란 이름 아래 여성에게만 주어진 의무와 희생, 시댁 중심의 질서 속에서 감당해야 했던 보이지 않는 노동.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한국 여성들의 현실과 젠더 불평등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명절은 축제가 아니라 고단한 과업이었다.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시간만큼은 건너뛰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어느새 세상은 바뀌었다. 명절은 자유로워졌고, 의무는 줄었다. 꿈꾸던 세상인데, 마음이 불편해지는 부분이 있다.
지나간 명절을 떠올려보면, 그 안에는 고단한 노동만 있었던 게 아니다. 모처럼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같은 밥상 위에서 웃던 그 순간들. 부엌에서 흘린 땀은 가족의 밥이 되고, 그 밥은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며 밥상을 차리는 일은 단순한 수고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를 빚는 일이었다.
토지의 한가위 풍경을 다시 보자.
빠른 장단의 꽹과리 소리, 느린 장단의 둔중한 여음으로 울려 퍼지는 징소리는 타작마당과 거리가 먼 최 참판댁 사랑에서는 흐느낌같이 슬프게 들려온다. 농부들은 지금 꽃 달린 고깔을 들면서 신명을 내고 괴롭고 한스러운 일상을 잊으며 굿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최 참판댁에서 섭섭잖게 전곡이 나갔고, 풍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실한 평작임에 틀림이 없을 것인즉 모처럼 허리끈을 풀어놓고 쌀밥에 식구들은 배를 두드렸을 테니 하루의 근심은 잊을 만했을 것이다. 이날은 수수개비를 꺾어도 아이들은 매를 맞이 않는다. 여러 달 만에 소증 풀었다고 느긋해하던 늙은이들은 뒷간 출입이 잦아진다. 힘 좋은 젊은이들은 벌써 읍내에 가고 없었다. 황소 한 마리 끌고 돌아오는 꿈을 꾸며 읍내 씨름판에 몰려간 것이다.
- 박경리, 토지 1권, 나남출판사-
그 시절의 한가위는 함께, 나눔, 그리고 축제의 시간이었다. 모두가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밥 한 그릇을 나누는 날. 그 안에는 세상의 어떤 편리함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질서와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이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 마음은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명절의 노동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는 명절. 그 불편함을 통과해야 비로소 진짜 ‘한가위’의 온기가 돌아온다. 나는 이 문장의 끝머리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그날, 마을은 하나의 리듬으로 숨 쉬었다.
모두가 함께였고,
그 ‘함께’가 바로 삶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