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쌈 마이웨이>, 다큐 <일; 우리가 온종일 하는 그것>
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한 장면, 이곳은 면접실이다.
텅 빈 이력서를 바라보던 면접관은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저에게도 질문을 해주세요.” 여주인공이 조심스레 말하지만,
“본 걸로 하겠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싸늘하다.
“그래도 뭐든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긴 다 시간이 금이에요. 그 시간을 이력서에 채워왔어야죠. 다른 사람들이 유학 가고 해외봉사 다닐 때, 당신은 뭘 했습니까?” 면접관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한다.
“저는 돈 벌었습니다.” 짧지만 단단한 대답이었다.
면접관은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깐다.
그녀는 면접장을 나와 버스 창가에 앉아 울었다.
“우린 항상 시간이 없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남보다 늦게 자는데도. 누구보다 힘들게 살았는데, 개뿔도 모르는 이력서 한 장이 내 모든 시간을 아는 척해서 짜증 난다.”
그녀의 눈물은 누군가는 기회로, 누군가는 생존으로 시간을 채우는데, 자신의 시간을 증명할 길이 없는 사람의 분노였던 것 같다.
삼십 년 넘게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법벌이일지, 자기 계발일지, 교육봉사일지, 아직도 자주 주제파악이 안 되는 채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보람 같다가 피로감이다가, 위로받다가 상실이다가... 나는 일을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다.
어느 게 진짜 나인지 자기 분석 안 되는 지식노동자. 그게 온종일 내가 하는 그것. 나의 일이다.
넷플릭스에서 버락 오바마가 제작한 다큐〈일; 우리가 온종일 하는 그것〉(Working: What We Do All Day)을 보았다.
이 작품은 버락 오바마가 직접 일터의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한다.
호텔 객실을 돌보는 하우스키퍼, 배달 운전을 하는 싱글맘, 로봇공학 엔지니어 그리고 대기업 회장까지...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통된 한 가지 질문이 주어진다.
"당신은 왜 이 일을 하는가?" 그리고 “좋은 일은 무엇인가?”
미시시피의 홈케어 돌보미 랜디 윌리엄스는 아침마다 혼자 사는 노인의 손을 잡아주며 하루를 시작한다.
시급은 낮고, 휴일도 불규칙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좋은 일이란, 누군가가 나 때문에 조금 덜 외로워지는 일.”
그녀에게 일은 생존이자 관계였다. 남의 하루를 돌보며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일. 그 평범하고 고단한 시간이 세상 어느 화려한 스펙보다 묵직해 보였다.
뉴욕의 피에르 호텔에서 20년 넘게 일해온 엘바 아폰테와 베벌리는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복도를 오가며 손님을 맞이한다.
오바마가 묻는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손님이 고맙다고 말할 때요. 그 한마디면 하루가 견딜 만해요.”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 사람을 대하는 태도
와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에게 좋은 일은 직업이 아
니라, 자리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피츠버그의 자율주행차 엔지니어 카르텍
이다.
그는 하루 종일 알고리즘을 다듬으며 기계와 인간
의 경계를 고민한다.
“내가 만드는 기술이 누군가의 일을 빼앗지 않길 바랍니다.”
가장 앞선 기술의 현장에서도 그의 마음속엔 여전
히 사람이 있다.
그 외에도 인도 타타그룹의 회장 찬드라세카란에게
도 어김없이 오바마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수십만 명의 일자리를 책임지고 있는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돌봄 노동자 랜디의 말과 닮아 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느낄 때, 그게 좋은 일입니다.”
서로 다른 세계, 다른 위치에 있지만, 좋은 일의 본질은 같았다.
〈쌈, 마이웨이>의 주인공이 흘린 눈물, 그건 패배의 눈물이 아니라 묵묵히 살아낸 시간의 증거였다.
다큐〈일; 우리가 온종일 하는 그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랜디의 손을 잡아주는 매일, 피에르 호텔의 "고맙습
니다” 한 마디,엔지니어의 망설임과 회장의 자부심
그들의 대답을 한 줄로 모아 본다.
" 좋은 일이란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드는 일."
삼십년 넘게 같은 자리를 맴돌았던 나의 일도
보람이었다가 피로였다가, 위로였다가 상실이었지만, 그 모든 진동의 합이 바로 나의 일이었다.
오바마가 화면 너머에서 나에게도 묻는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이제는 조금은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일이란, 온종일 반복되는 일 중에도,
누군가에게 오늘 하루를 더 잘 버텨낼 수 있도록 작은 힘이 되어주고,
덕분에 내 삶도 어제보다 한층 더 의미로 채워지는 것."
이력서는 여전히 모든 시간을 다 기록하지 못하겠
지만, 그 여백을 채운 건 남는 시간이 아니라 누군
가 곁에서 함께 버텨 준 우리들의 시간이었음을.
그런 시간들이야말로 이력서에는 적히지 않지만 우리가 진짜로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늦은 밤 마지막으로 사무실 불을 끄며 혼자 터벅터벅 나오던 순간, 다시 해보자며 보고서를 고쳐 쓰던 새벽, 누군가의 실수를 덮어주며 대신 책임을 졌던 하루들.
그건 평가도, 보상도 없었지만, 우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나와 당신에게 조용히 말해주고 싶다.
“오늘도 온종일 반복되는 일로 버티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하루가 결코 의미 없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