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얼마 전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 강연회에 다녀왔다.
영국 출신의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Johann Hari)는 우리가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약탈로 설명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집중력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난당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알림, 자동 재생되는 영상, 일상의 리듬을 깨뜨리는 메시지와 피드 속에서 우리의 집중력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
세상은 더 빠르고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우리는 깊이 생각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요한 하리는 이 문제를 개인의 게으름이 아니라 생각할 자유를 훔치는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로 본다.
대기업과 플랫폼들은 이윤을 위해 우리의 주의를 조각내어 팔고, 더 많은 자극과 영상을 제공함으로써 개인이 집중을 통제할 수 없도록 환경을 설계한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
이렇게 도둑맞은 우리의 집중력은 곧 스스로 생각할 힘을 빼앗아 간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책이 있었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이다.
하리가 21세기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면, 헉슬리는 이미 90년 전 그 이후의 세상을 예언했다.
2540년의 인공적 낙원이라는 포드의 세상에서, 인간은 시험관 속에서 정해진 계급으로 태어나 살아간다.
그들은 사유 없이 쾌락과 안정 속에 길들여지고, 슬픔·분노·회의는 약으로 지워진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를 잃었으나 자유를 알지도 못하는 세상,
완벽한 질서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제거했을 때, 그곳은 더 이상 인간의 세상이 아니다.
“왜 당신은 사람들이 오셀로를 읽게 그냥 내버려 두지 않나요?”
야만인 존이 포드님 무스타파 몬드에게 묻는다.
그는 대답한다.
“만족한 상태에는 불우한 환경에 대한 찬란한 투쟁도,
유혹에 맞서는 저항도, 격정과 회의가 소용돌이치는 숙명적인 패배의 화려함도 없습니다.
행복이란 전혀 웅장하지 못하니까요.”
신세계의 인간들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세계에는 결핍도 슬픔도 사랑의 상처도 없다.
고통이 사라지자 감정은 얕아지고, 사유가 사라지자 인간은 순응한다.
얼핏 완벽한 이 사회는 결국 생각할 능력을 잃은 인간들의 낙원이다.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과 헉슬리가 예견한 복속당하는 사유는 닮아 있다.
우리는 화면의 자극에 길들여지고, 정보를 소비하며 사고를 멈춘다.
스스로 복속되기를 택하는 존재, 그것이 지금의 우리다.
헉슬리의 신세계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재의 우리 사회 안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멋진 신세계> 속 야만인 존의 너무나 강렬했던 마지막 대사를 잊지 못한다.
“나는 늙고 추악해지고 성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 권리,
내일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권리,
온갖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를 요구합니다.”
존은 고통을 통해 자유를 요구한다.
고통받을 권리, 불안할 권리, 흔들릴 권리, 그것은 완벽한 사회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인간의 특권이다.
고통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만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고 존재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이제 그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가?
아니면 편안함의 시스템에 복속된 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안정을 택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도둑맞은 집중력> 은 인간의 주의력을 되찾자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집중력 그 자체가 아니라, 집중을 통해 깊이 생각하고 선택할 자유다.
우리는 아직 고통받을 권리, 실패할 권리, 실수할 권리, 그런 권리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우리는 아직 멋진 신세계의 복제된 인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