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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며 드는 생각

조나단 글레이즈 〈The Zone of Interest>

by 뭉클

한 남자가 무대 위에서 꼬깃해진 종이를 꺼내 들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글을 읽어 내려간다.

그는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의

수상 소감을 말하는 중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에 홀로코스트가 이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의 과거를 보기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보자.
이 영화는 비인간화가 만들어내는 최악의 결과,
우리의, 과거의, 현재의 모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들이 그때 무엇을 했는지 보세요.”
“아니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세요.”

손에 들린 종이는 그의 목소리처럼 내내 떨리고 있다. 이 사람은 바로 조나단 글레이즈 감독이다.

나는 그 떨림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본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세상의 비난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의 그들과 지금의 우리가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속한 세계가 또 다른 폭력의 주체로 변해가는 것을 바라보는 두려움과 양심을 감당해 내기 위해 용기를 낸 인간의 떨림이다.

아마도 그러한 책임감으로 그가 그 자리에서 영화의 의미를 말하지 않으면, 그 침묵은 또 다른 가해가 된다는 것을 걱정한 건 아닐까.

영화의 제목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아우슈비츠와 그 주변지역에 붙였던 이름이라고 한다.

폭력과 잔혹함의 현장을 ‘관심 구역’이라 부른 시대, 그 말 안에는 인간의 잔인함이 얼마나 일상과 가까운지를 드러내는 역설이 냉혹하게 담겨 있다.

이제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다.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의 일상을 무심히 따라간다.

루돌프 회스의 집을 기준으로 거대하게 둘러쳐진 아우슈비츠의 담장이 보인다.

바로 그 담장 밖에서는 유대인들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며 남기는 굴뚝의 연기가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담장 안에서는 회스의 가족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인공적으로 손질된 정원의 꽃과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들의 노동으로 가꾼 정원에서 꽃을 꺾고, 그들이 닦은 식기를 식탁 위에 올린다.

하늘에는 재가 흩날리고, 땅 아래에는 비명이 묻히지만, 그들은 담장을 등지고 평온한 하루를 살고 있다.

그들은 꽃향기로도 숨길 수 없는 굴뚝 연기에서 피어오르는 폭력의 향기를 알고도 외면한다. 그들의 일상은 그들 삶을 지켜내려는 의도된 외면이고 망각처럼 보인다.

루돌프 회스는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믿고있다. 홀로코스트의 잔혹한 행위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저 상급자의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지켜내는 것뿐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잘못일리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 태도, 풍경에는 무심하고 무감각하면서, 담안의 자기것만 지키려는 평범한 태도가 조나단 글레이즈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은 언제나 괴물의 얼굴을 하고 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의 정원에서 꽃을 꺾는 무심한 손끝과, 웃음과 침묵 사이에서 자라나는 무감각의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지금은 과연 그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작년 한 해, 한 지도자의 무지, 무사유, 무책임으로 자행된 믿지 못할 사건을 겪었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에 벌어진 큰 충격과 혼란도 지켜보았다.

지도자는 이 어이없는 결정을 내리고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별일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 하고, 어떤 이는 위에서 명령하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침묵했다.

“나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다.”
“결정권이 내게 있는 건 아니다.”
“상급자의 판단이니 따를 수밖에.”
"......"

그건 내 일이 아니야,

말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어,

나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이야...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심히 듣고 흔히 하는 말들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삶의 두려움과 체념 속에서 이루어진 침묵과 무관심의 말들이다.

그러나 그 불의의 불씨는 조용히 자라나, 곧 누군 가의 고통을 허락하는 큰 불씨가 된다.

악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말하지 않는 침묵, 개입하지 않는 태도, 생각하지 않는 무감각,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체제를 만든다.

아무도 나서지 않기에, 그 체제는 더욱 단단해진다.

생각은 단순한 지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공감 능력이다.

사유하지 않는 사회는 감각을 잃고, 불의에 무뎌지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진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저서에서 말하는 <악의 평범성>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삶의 곳곳에서 매일매일 판단의 순간을 맞는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이 침묵은 누구에게 상처가 되는가.”
“생각하지 않는 자가 가장 무서운 자다.”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그 자유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한다.

우리가 사유를 멈추지 않고 타인의 생각에 공감할 때, 비로소 인간은 한나 아렌트가 주장하는 평범함 속에 숨어있는 악을 넘어설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관심구역은 어디인가?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며 계속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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