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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상상하기 좋은 날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차창 밖, 산과 들은 빠르게 스쳐갔다.

바람소리 하나 없이 달리는 장면은 내가 열차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했다. 그저 비스듬히 앉아 미술품을 감상하는 기분이랄까. 본디 몸과 시각에서 오는 정보의 차이가 클수록 멀미가 난다던데, KTX는 어쩐지 어지럽지 않았다. 아마도 빠르다고 자각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를 넘어섰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 눈을 감았다. 생경하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때문인지 약간의 졸음이 몰려왔다.


잠시 후 모든 소리가 음소거된 감각 때문에 눈을 떴다. 터널 안 깜깜함이 창밖을 집어삼키자 초췌한 몰골의 남자가 나타났다. 서로는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말은 없었지만 많은 사연을 품은 듯했다. 쑥스러움에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지만 그도 그랬음이 분명했다. 열차 안에서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생각이 잠긴 것이 얼마만인지 떠올렸다. 과거 코로나가 창궐하던 때를 기억한다. 대구가 어떤 종교 단체로 인해 고립되고 있었다. 유독 치솟는 감염자와 사망자 수는 대구를 탐탁지 않은 곳으로 보기 충분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 상황이 답답했고, 그 단체를 더욱 증오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덕분에 독서를 하게 되었고 틈틈이 글도 쓰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증오라는 감정은 극복하고 나면 매번 새로움이나 특이함이라는 감각을 선물했던 것 같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기분은 별로였다. 출장요청이 오랜만인 것도 있었지만, 여행을 위한 옷가지와 물품 대신 공구와 한숨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여행과 출장은 타지로 간다는 것은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일이냐 아니냐, 이것 하나 차이만으로 기분은 정확하게 반대로 멀어진다. 이왕 가는 거 기분 좋게 갈 수는 없을까? 이런 기분으로 간다면 끌려간다는 생각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마음 가짐만 긍정적으로 가지길 스스로를 다그쳤다. 여전히 삐져나온 입으로 보조 배터리를 챙겼다. 혹시 몰라 자기 전에 조금씩 읽던 책도 챙겼다. 핸드폰 방전을 걱정하는 만큼 나 자신에 대한 방전대책 마련을 위해서였다.


KTX 열차 안,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듣자 하니 살집이 조금 있는 중년 남성이 새벽에 일어나 피곤에 쩌든듯한 상태로 내는 소리 같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단순히 소리만 커지는 것은 아니었다. 코를 고는 주기가 바뀌기 시작하더니 숨을 쉬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분명 수면 무호흡증 때문에 고통받는 것 같았다. 내심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그보다 눈을 붙일 수 없을 정도의 소음이 문제였다. 나는 윗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도 골고 싶어 고는 게 아니겠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냐며 속으로 한껏 비난했다. 역시 출장은 뭘 해도 피곤하다며 하루의 정의를 확신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타나 그를 조용히 흔들어 깨웠다. 낮은 음성만큼이나 악의는 없었고, 자다 깼던 그도 부드러운 음성에 벙벙해하면서도 요란스러운 단잠을 깨운 일로 다그치지 않았다. 다시 주변은 고요로 가득하다. 적막을 선물해 준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 이 생각은 그저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상상이었다. 스스로의 욕망이 어느 정도 채워지면 현실처럼 내 머릿속에 그려지곤 했다. 마치 정말 그런 일을 목격하는듯한 설렘과 함께. 스스로는 실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상상 속으로는 마음껏 의인이 되기도 하고 또는 목격하기도 한다. 그 시간만큼은 현실의 부산스러움도 나를 방해하지 못했다.


문득 가져온 책의 존재를 떠올랐다. ‘문득’이라고 하였지만 문득일리는 없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내가 독서를 할 때 느끼는 감각이 있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찰나에 드는 생각에 질감. 생각이 말랑하고 현실과의 접점이 무뎌진다. 마치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고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기분이다. 지금도 어떤 현실의 욕망이 나를 묘한 감각 속으로 데려다 놓았다. 이곳에서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내가 본디 살던 세상이 있고 생각하는 세상이 추가되는 게 아니라, 모두 병렬로 늘어져 있는데 내가 새처럼 날아다니며 감각하는 것 같다. 모든 조건이 들어맞아야 했다. 고요함 그리고 영적인 존재를 느낄 만큼의 섬세함까지 동원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세상으로 쉽게 넘어온 것인지 의아했다. 활자가 차례로 들어오고, 끊임없이 들어차야 겨우 볼 수 있었던 미지의 세상 아니던가. 눈앞에 성큼 도래한 이유가 궁금했다. 우울하기만 하던 출장날이 무척이나 쓰고 싶은 하루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소중하다. 어떻게든 느낀 점 그대로 적어서 담아내고 싶다. 결국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은 예지력이 되어 오늘의 운세를 점치고 있다.


오늘은 비록 출장 가는 날이지만, 뜻밖에 수확이 있었다. 어쩌면 책을 챙겼다는 점에서 복선을 찾았을지 모른다. 좀 전에 일들을 생각하자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마치 오늘 정도는 계속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출장과 열차 그리고 코골이까지 이 모든 사건이 차례로 배열되면 희열로 점철된 세상에 또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도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창가를 응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열차는 빗물을 묻히며 여전히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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