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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에 대해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언제부턴가 조금씩 편해진다.

글을 대하는 태도가 어느덧 기호식품을 넘어 끼니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다. 매일 먹는 밥처럼 이미 나를 나로서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양분이 되었다. 글이 근처에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소파에도 침실에도 심지어 회사 머리맡에도 책은 존재했다. 글은 언제나 나를 맴돌았다.


독서를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할 것이 없어서 어슬렁 다니다가 손에 잡힌 게 책이었다. 책을 읽다 보니 스스로가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독서를 하는 시간에는 세상이 부여한 고통도 책무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모를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마치 돈 키호테가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해 싸운다거나 양동이를 투구라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책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은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독서는 마음에 양식이고. 사실 마음에 살을 찌운다는 행위에는 적절치 못한 비유 같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과하면 독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독서는 예외다. 많이 하면 할수록 현실에 고증을 잊을 수 있었고, 앞으로 벌어질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울 수 있었다. 지식과 마음에 풍요는 덤으로 온다. 단지 과한 독서에도 단점이 있다면 쓰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재미로 읽다 보면 재미로 쓰고 싶어진다.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다는 의지가 생기고 자신감이 붙는다. 그리고 새로운 명언을 경험하고 만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세운다 맞기 전에는" 마이클 타이슨


정말 쓰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쓰고 나서 느낀 점 중에 하나다. 평소 맞을 일이 없어 공감을 못했던 말인데, 글을 쓰고 나서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그렇게 실컷 두들겨 맞으면서도 끊을 수 없는 게 '쓰기'이기도 했다. 쓰는 만큼 나아지니 재미가 있어서? 그것 또한 아니었다. 쓰기는 절대로 상향 곡선을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평행으로 가는 것 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 쉽게 돌려주지 않으려는 무언의 벽과 마주할 뿐이다.


차원이 다른 포털에 들어선 느낌이다. 독서는 할수록 쓰기를 부추겼고. 쓰기는 쓰면 쓸수록 나아가지 못함, 나아지지 못함과 같은 부질없음을 야기했다. 이런 공허함은 다시금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를 의지를 불태웠다. 다시 할 수 있다거나 나도 그들처럼 쓸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쓸 수 있었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 같은 곳에서 그저 활자와 자신만에 세상에서 갇혀 살았다. 그리고는 결국 깨닫는다. 쓰기와 독서는 다름이 아니고, 쓰기는 잘 쓰기 위래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은 쓰고 있지만 불안하지 않다. 본론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으며 결론은 어떤 식으로 할지를 고심하지 않는다. AI가 글을 잘 쓴다는 사실에 동요하지 않으며 "글 써서 어디다 써먹을래?" 같은 말에 귀담아듣지 않는다. 단지 쓰기와 읽기를 반복함으로써 느슨하지만 자기만의 기준과 정의를 세웠기 때문인 듯했다.


글의 본질은 원래 그런 것이다. 글과 더 가깝다고 타인보다 더 교양 있다거나 더 우월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단지 자신이 생각하는 생각의 결이 어디로 돋아있고 자신의 본디 모습이 무엇인지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더듬더듬 읽으며, 드문드문 써내려 가더라도 그 사이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타인과 나를 번갈아 돌아보며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글은 지금까지도 써왔고 앞으로 쓸 생각이다. 이미 당장의 미래, 더 먼 미래까지 어떤 글을 읽으며 쓸 것이란 계획도 이미 충분하다. 애써 생각하고 사유한 결과가 아니라, 쓰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 같다. 과거에 썼던 글을 읽으며 과거에 나를 곱씹을 수 있고, 지금 쓰는 글을 만끽함으로써 오늘의 나와 마주할 수 있다. 앞으로 써나가야 할 글을 떠올림으로써 내가 누가 될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는 것 같다.


마치 인간은 밥을 먹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생리적인 사실에서만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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