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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유 난로와 당번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아침부터 차가운 바람이 볼을 매섭게 쓸고 지나간다.

바지에 찔러두었던 손을 꺼내 얼음장 같던 볼에 비볐다. 볼은 노곤하게 녹아내리면서 하얀 각질 같은 것을 떨어내기도 했다. 도시락 가방에 온기가 바지를 데웠다. 덕분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따뜻한 밥과 반찬 두 개, 그리고 국까지 챙겨 주셨을 것이다. 학교에 가서 몰래 꺼내볼 생각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아파트 앞 큰 사거리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문방구가 밀집한 삼거리를 지나면 정문에 다다를 수 있다. 지금 걸음으로 가면 5분이면 걸어갈 거리긴 했지만 그때는 왜 그리 멀었던지. 아마도 콘크리트 틈서리에 난 풀 한 포기만 봐도 웃을 수 있었고, 길가에 핀 봉선화만 봐도 설렐 수 있는 감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느긋함이 낭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 보니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아침 등교시간만 되면 거리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넘쳐났다.


학교 교문을 지나자 운동장 가운데 교단에 달린 커다란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시각은 7시 30분. 평소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이번 주는 내가 당번이기 때문에 일찍 학교에 와야 했다.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각 반마다 당번이 2명 있었다. 주단위로 번갈아가며 맡게 되는데 반에서 해야 할 일들을 대신 처리했다. 매시간 판서 지우기, 분필 지우개 털기, 쓰레기통 비우기, 급식 우유 나르기, 화분에 물 주기, 특히 겨울에는 등유 난로 가동을 위해 기름을 받아오는 일도 해야 했다.


교실문을 열자 밤기운이 받아낸 찬 공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나무로 된 책걸상과 왁스 칠한 마룻바닥 특유의 냄새가 학교에 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교실에 왔음에도 입김이 나온다는 게 낯설어하고 있을 무렵, 또 다른 당번 친구가 교실로 들어왔다. 그는 내 짝꿍이기도 했다. 나는 당시 키도 크고 성도 최 씨에 이름 첫 장에 ㅎ자가 들어가서 번호도 거의 끝이었고, 자리 또한 뒷자리에 앉았다. 그때만 해도 남아 선호사상의 잔재가 남아있던 터라 각 반마다 남자아이들이 대여섯 명씩은 더 많았다. 이번에도 내 짝꿍은 또 남자. 서로가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당번일 할 때만큼은 쿵작이 잘 맞았다.


“니 빨리 왔네, 언제왔노?”

“나도 방금 왔다. 소각장에 기름 타러 가까?”

“빨리 가면 좋지 지금 가자”


매일 아침 7시 30분이 되면 소각장 옆 창고 문이 열린다. 체육 선생님이 먼저 와서 각 반마다 가져갈 등유를 준비해 둔다. 나는 명부에 이름과 반을 적고, 2열로 나열된 20리터짜리 말통을 들었다. 기름통은 혼자 들기에 무겁고, 그렇다고 둘이 들기에 불편했다. 결국 한 명씩 번갈아 들고 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서로는 네가 덜 갔니 내가 더 갔니 하며 투닥이며 교실로 향했다. – 그때 손수레 같은 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 조금 무겁긴 해도, 친구들과 선생님이 오기 전에 난로를 피울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들뜨기도 했다. 나와 짝꿍은 서로의 부지런함을 감탄했다.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라는 식에 무심함을 흘리며 길게 늘어선 줄에서 보내오는 부러운 시선을 즐겼다.


난로에 기름을 넣는 것도 당번들 몫이다. 난로 옆에는 기름통이 붙어 있는데, 꼭 참외처럼 생겼다. 나는 낡아빠진 목장갑을 끼고 기름통 뚜껑을 열었다. 여남은 기름 때문에 등유냄새가 새어 나왔다. 말통에 개미핥기 주둥이처럼 생긴 부분을 기름통에 밀어 넣고 들어 올렸다.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한참 동안 들어간다. 이윽고 부지런한 친구들이 하나 둘 등교하기 시작했다. 당번이 못할 짓인 듯 보고 있으면서도 막상 당번이 되면 척척 해내는 그들이다. 딱딱딱, 레버가 점화를 알리는 소리를 냈다. 고약한 냄새가 교실을 채웠지만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지금도 차가운 실내를 마주하면 그때의 등유 냄새가 코 끝에 스미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잠시 후 난로에서 열이 나면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짝꿍은 커다란 물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아와서는 난로 위에 올린다. 난로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것 마냥 이음새마다 뚝 뚝 소리를 냈다. 마치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조금 더 있으면 주전자에서 김이 나기 시작하며 후끈한 열기로 교실을 데우기 시작한다. 짝꿍과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미션완료에 대한 기쁨을 만끽했다. 다른 친구들은 난로 곁에 열기를 쬐며 따닥따닥 붙어 있다. 벌써부터 도시락을 까먹는 남학생도 있고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여학생도 있다. 난로의 온기가 교실을 데우는 만큼 아이들의 일상도 평범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가 시작될 수 있는 데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춥던 등굣길도 교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따뜻했던 기억, 항상 깨끗했던 칠판과, 2교시만 끝나면 채워져 있는 우유는 모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등유 냄새처럼, 따뜻함은 늘 누군가의 손끝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아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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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