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본질을 묻다
2025년 8월, 미국판 보그에 게스(GUESS)의 AI 모델 ‘비비안’이 등장하면서 패션계가 발칵 뒤집혔다. 화면 속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패션 모델이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감수성은 달랐다. 틱톡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사람과 비교당해야 하냐’는 댓글이 수만 건의 공감을 얻으며 확산되었다. 이는 단순히 한 브랜드의 캠페인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었다. 패션계가 AI 시대에 무엇을 잃게 될지에 대한 불안을 집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패션계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라는 경제 논리를 따라 AI 모델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보그 사례는 가상의 존재가 실체 없는 얼굴, 서사가 결여된 뮤즈로서 불편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사건은 패션 산업이 지금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 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AI 신뢰의 역설, 진정성은 어디에 있는가
AI 모델 비비안은 패션 광고에서 진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례다. 보그 지면에 등장하자마자 소비자들은 ‘완벽하지만 가짜’라는 불편함을 느꼈고, 그 불편은 곧바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 현상은 이른바 ‘AI trust paradox’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매끄러워지지만, 소비자는 그럴수록 오히려 진짜가 아니라고 직감한다. 광고 속 인물이 실제로 제품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작은 균열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곧 전체 이미지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패션은 옷 그 자체가 아니라 옷을 입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왔다는 점에서, 이 신뢰의 붕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넘어 패션의 존재 이유를 흔드는 위기다.
창작 생태계의 균열
AI 모델은 효율성을 가져오지만, 그 이면에는 창작 생태계의 축소라는 문제도 숨어 있다.
H&M은 2025년 7월, 실존 모델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트윈을 공개해 새로운 AI 모델의 유형을 제시했다. 디지털로 복제된 모델이 얻은 수익은 모델 본인에게 돌려주며 권리를 보장한다고 밝혔다. ‘AI는 위협이 아니라 협업’이라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협업 유형조차 현장의 일자리를 온전히 지켜주지는 못한다. 사진가,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명 감독 등 많은 창작자들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뉴욕의 모델 권익 단체 ‘Model Alliance’는 충분한 보호 장치 없이 디지털 복제가 이루어진다면 수많은 창작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장의 패션 이미지는 수많은 손길과 우연이 모여 완성된다. 그러나 디지털 효율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 패션이 가진 인간적 호흡은 점차 사라질 수 있다. AI가 가져올 가장 큰 위협은 모델의 대체가 아니라, 패션 이미지 제작이라는 집단적 창작 과정 전체의 위축일지 모른다.
다양성의 착시
AI 모델은 도입 초기 다양성을 확대하겠다는 명분으로 주목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리바이스(Levi’s)다. 2023년, 리바이스는 소비자가 제품 착장 이미지에 모든 인종, 체형, 연령의 AI 모델을 대입할 수 있도록 해 UX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존 모델을 고용하지 않고 다양성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비판이 거세졌고, 리바이스는 입장을 수정해 물러섰다.
스페인의 망고(Mango) 역시 2024년 여름, 인간 모델을 배제한 AI 생성 이미지 광고를 공개했다. Financial Times는 이러한 흐름이 모델과 크리에이터들의 일자리를 축소하고 표현의 진정성을 약화시킨다고 평가했다. The Guardian 또한 AI 모델이 새로운 다양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주장과 달리, 오히려 획일적인 미적 기준을 강화한다는 우려를 전했다.
이에 대해 패션 심리학자 Jennifer Heinen은 “이 아바타들은 편향된 학습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며, 좁고 백인 중심적인 미의 기준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체 이미지를 해치는 것을 넘어 정체성을 분열시킨다. 미디어에 당신과 같은 모습이 없다면, 당신은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의 자아 인식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심리적 위험을 드러낸다.
지켜야 할 본질
빠르고 저렴한 AI 뮤즈는 분명 매혹적이다. 그러나 지금 패션이 경계해야 할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불러오는 진정성의 붕괴, 창작 생태계의 축소, 다양성의 왜곡이다. 패션은 언제나 불완전한 인간의 서사에서 힘을 얻어왔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1980)에서 말했듯, 사진의 매력은 완벽한 연출이 아니라 우연히 남은 작은 흔적, 불완전한 요소에 있다. 패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매끈하게 가공된 AI 모델의 얼굴보다, 인간이 가진 주름·흔적·표정에서 더 진실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AI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다.
‘가짜의 불편함을 어떻게 관리하며, 진짜와 공존할 것인가’다. 앞으로 브랜드가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첫째, AI 활용을 투명하게 표기할 것. 둘째, 실존 모델과 병행해 인간적 서사를 유지할 것. 셋째, 모델·크리에이터·소비자를 아우르는 윤리적 권리 구조를 설계할 것.
AI 뮤즈 시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패션이 지켜야 할 본질을 놓치는 순간, 아무리 정교한 가짜도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패션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