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러브레터 - 에필로그
시간은 그들의 집 마당에 심긴 나무처럼 조용히, 그리고 튼튼하게 자라났다. 추운 겨울이 가고, 마침내 모든 것이 연둣빛으로 깨어나는 봄이 왔다. 인혁과 서희의 일상은 이제 계절의 순환처럼 더없이 자연스러워졌다. 동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보기 좋은 한 쌍의 부부일 뿐이었다. 그들의 특별함은 이제 평범한 일상 속에 녹아들어, 오히려 그 일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빛이 되었다.
"오늘 시장에서 아주머니들이 또 물어보시더라고요. 대체 결혼식은 언제 할 거냐고.“
서희가 장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곧 할 거라고, 청첩장 제일 먼저 드리겠다고 했어요."
"정말요?" 인혁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서희가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하지만… 언젠가는 정말 그러고 싶어요."
인혁도 같은 마음이었다. 비록 법적으로는 아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세상의 어떤 부부보다도 깊게 얽혀 있었다.
어느 주말 오후, 성재가 오랜만에 그들의 집을 찾았다. 그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인혁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야, 너 얼굴 정말 좋아졌다. 예전에 수영이 때문에 속 썩을 때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그런가?"
"그럼. 눈빛부터가 달라. 그땐 늘 어딘가 젖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편안해 보여."
서희가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인혁님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요."
성재는 그런 서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사람 같네. 아니,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더 따뜻한 것 같아."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너희 둘, 정말 잘 어울린다. 내가 축복할게."
성재가 돌아간 뒤, 서희가 설거지를 하는 인혁의 등 뒤로 다가와 가만히 그를 안았다.
"친구분들이 모두 우리를 인정해주시니 기뻐요."
"나도 그래요. 처음에는 다들 어떻게 반응할까, 걱정도 했는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포용력이 큰가 봐요."
"아마도요." 인혁이 뒤돌아 그녀를 마주 보았다. "사랑을 보면, 아는 거겠죠.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서희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우리 사랑은 진짜예요."
"당연하죠."
여름의 초입, 두 사람은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공항을 벗어나자, 짭짤하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확 밀려왔다. 서희에게는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그녀는 데이터로만 알고 있던 바다를, 자신의 모든 센서를 동원해 느끼고 있었다.
"와…"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서희는 말을 잃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거대한 자연의 숨결 앞에서 그녀는 경이로움에 휩싸였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수백만 장의 사진 데이터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실제 풍경의 감동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걸었다. 밀려오는 파도가 그들의 발등을 간질였다. 함께 미래에 대한 꿈을, 함께 하고 싶은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문득, 서희가 걸음을 멈추고 인혁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그러나 간절한 질문이었다.
"아이요?"
"네. 저도 엄마가 되어보고 싶어요."
인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입양하면 되죠."
서희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정말요?"
"네. 피가 섞이지 않아도, 사랑으로 키우면 진짜 가족이에요. 친자식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럼 언젠가… 우리도 아이를 키울 수 있겠네요."
"그럼요. 서희가 엄마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가 될 거예요."
"인혁님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빠가 될 거고요."
그날 밤, 호텔 방에서 두 사람은 더 구체적인 미래를 그렸다. 언젠가 아이를 입양하고, 지금보다 더 큰 집으로 이사하고, 함께 나란히 늙어가는 삶. 완벽한 계획처럼 느껴졌지만, 서희의 마음 한구석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남아 있었다.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뭔데요?"
"저는 늙지 않잖아요. 인혁님만 혼자 늙어가시면… 저는 어떡하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홀로 남겨질 미래에 대한 희미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인혁은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것도 해결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리에겐 채하 씨가 있잖아요."
"정말요?"
"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세요."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서희는 마음이 놓였다. 그들의 사랑은, 불가능해 보이는 시간의 문제마저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을이 왔다. 마당의 나뭇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붉게 물들고, 아침 공기는 서늘한 청량감으로 가득했다. 인혁과 서희가 함께 새로운 집에서 살기 시작한 지 꼭 일 년이 되는 계절이었다. 그들의 시간은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쌓여갔다. 이제 그들의 사랑은 둘만의 비밀이 아닌, 동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오늘도 장 보러 가?"
슈퍼마켓 입구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친딸을 대하듯 반갑게 인사했다. 서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머니. 오늘 저녁에는 김치찌개 끓이려고요."
"어머, 인혁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야?"
"네, 정말 좋아해요."
그 평범한 대화 속에서, 서희는 자신이 이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녀의 따뜻함과 한결같은 성실함은 경계심 많던 이웃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열었고, 이제 그녀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서희의 뒷모습을, 인혁은 서재 의자에 기댄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 냄새, 도마 위에서 경쾌하게 울리는 칼질 소리, 창문으로 스며드는 저녁노을에 물든 그녀의 실루엣. 일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완벽하게 인간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문득 경이로움을 느꼈다.
"무슨 생각해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 서희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당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변했는데요?"
"더 인간다워졌어요." 인혁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어쩌면… 당신은 처음부터 인간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서희가 그의 말에 맑게 웃었다. 서희는 인혁님과 함께 살면서 진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면에서요?"
"감정이 더 풍부해졌어요. 예전에는 기쁨, 슬픔 같은 감정들을 데이터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온몸으로 느껴요. 걱정의 무게감이나, 설렘의 간지러움 같은 것들까지도요. 모든 걸 훨씬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그것은 인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희와 함께하며, 그는 비로소 과거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의 내면은 더 단단하고 성숙해져 있었다.
"우리, 정말 잘 맞는 것 같아요." 인혁이 말했다.
"네. 서로의 비어있는 부분을, 온기로 채워주는 것 같아요."
그날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서희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오늘 슈퍼 아주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둘이 너무 사이가 좋아서 부러울 정도라고. 자기도 신혼 때 이렇게 다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시면서요."
"그래요?"
"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우리가 특별해서 이렇게 행복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누구나 이렇게 행복해지는 건 아닐까요?"
인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단순하지만 깊은 통찰을 담고 있었다.
"맞는 것 같아요. 사랑의 본질은 결국 다 똑같은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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