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과 이야기하는 것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하는 나.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전혀 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듣는다.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몇 년 동안 간간히 전해 듣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알지는 못하지만 익숙해진다..
때론 이렇게 묻기도 한다
"아!~그 사람?? 응~~"
만나본적도 없으면서 왠지 친근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만나게 되면
전달해서 듣는 이미지와 내가 보는 이미지가
비슷한 경우도 있고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그런 식으로 궁금한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나이와 상관없이 말이 척척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신기하다.
세대도, 살아온 배경도, 경험도 다르지만,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진다.
우리는 흔히 이런 현상을 ‘경험이 겹쳐서’라고 쉽게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나는 이 질문을 곱씹으며 인연과 공감, 그리고 '사람'사이의 관계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경험의 겹침은 분명 소통의 중요한 토대다.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같은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기쁨을 맛본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웃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저도요~!'라는 말 한마디에 깊은 위로를 받는다.
경험의 공집합은 공감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다.
하지만 세상에는 경험이 전혀 겹치지 않아도, 나이 차이가 스무 살, 서른 살이 나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와의 대화는 신기하게도 자연스럽고,
때론 그 시절
내가 처절히 고민했던 경험의 마무리를 잠깐 흘리며 상대는 조금 쉽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전한다.
여기에는 단순한 경험의 겹침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인연’과 ‘공감’이라는,
더 깊은 차원의 연결이다..
철학자 무니에는 “너와 나의 만남”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고 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나이, 배경, 경험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서 살 수 없는 본질에 닿아있다.
난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어쩌면
내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이 보기엔 내 삶이 불행해 보일지 모르지만
정작 본인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스펙타클하게 하나하나를 잃어가기도
때론 이루기도 하면서 성취감으로
작은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과정이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외로움은 다르다.
그건 나 혼자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고독이라는 단어보다 더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무언가 지나온 경험이 비슷하거나
살아온 녹록지 않은
기억의 얼룩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다독여주고 싶다.
문득 스쳐 보이는 외로움의 표정 안
그늘이 보였다.
언젠가 나도 그 그늘을 지우고 싶어
거울 보면서 웃는 연습..
감추는 연습을 했던 때도 있었으니까.
내 얼굴은 내가 볼 수 없다,
그 당시 누군가가 나에게 어렵게 다가와서 해주었던
그 말이 나를 들여다보게 했으니까..
그게 소통의 시작이다.
받아들임으로써..
소통은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그 입장에 서보려는 능력이다.
이것은 단순히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공감은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으로 작동한다.
이해하려는 마음, 함께 느끼는 감정, 그리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배려가 모두 어우러질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말이 통한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연은 '운명'과는 다르다.
운명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조건이지만, 인연은 그 조건 속에서 내가 어떻게 선택하고,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건 내 마음이 먼저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거다.
말이 통하는 인연은,
각자의 삶에서 주어진 조건을 넘어,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이해하려는' 능동적 선택'에서 출발한다.
운명과 운명, 두 개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특별한 연결이다.
'운명'이라는 무게감 가득한 단어를 써보는 것은 그만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사함'이었다.
최근 몇 년간 무언가를 부연설명해야 하는
만남의 시작과 관계의 연장에 많이 지쳐있었던 이유였지 않을까.. 싶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왔다 해도
어느 순간 부연설명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문제는 해도 이해 못 하거나
안 듣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플라톤의 대화처럼, 참된 소통은 질문과 응답, 상호작용 속에서 진리가 드러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우리’라는 공동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서로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함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때론 나의 감성의 대화를 이성의 잣대로
짓누르고
때론 나의 논리적 대화를 감정으로
잘라버리는 것이 아닌
적어도 그때는 그저 이해하지 못할 땐
미소라도 짓거나(비현실적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라는
품위 있는. 유연함을 가질 수 있기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때론
나. 스스로와의 대화도
솔직한 공감의 용기가 필요하다.
나도 때론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있는 것 같으니.
너무 많은 '만약'과 '혹시'로
나를 짓누르지 않기를..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자유로워지기를..
오늘도 조금 솔직해지자.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