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마음이 건조해질 때마다 꺼내 보는
나의 올드영화 중 하나
“냉정과 열정사이”
요시마타 료의 음악이 미켈란젤로,, 다빈치.. 단테와 보티첼리로 상징되는 르네상스의 정서적 사유가
가득한 도시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영화에 반해 떠났던 그 곳.
준세이와 마오이가 만나기로 했던
두오모의 돔,
골목마다 수백 수천년의 스토리가 있고
따스한 햇빛은 석재의 균열을 따라 부서지며 그곳에 있을 때
마치 내가 그 시대의 안에 포함된 듯
정지된 듯했다.
피렌체의 골목은 좁고, 오래되었고, 조용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말없이
나의 마음과 마주하게 했다.
마치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무엇을 놓쳤는지,
무엇을 품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려 하는 것 같았다.
피렌체의 빛은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벽돌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도,
아르노 강 위에 흔들리는 불빛도,
모두가 천천히,
오래 머물렀다.
마치 도시 전체가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감싸 안고 있는 것처럼.
고미술 작품을 복원하는 준세이의 설정도 기억과 감정을 복원한다는
상징적 메타포다.
사랑은 언제 완성되는가.
함께 있을 때일까,
아니면
끝내 함께하지 못했을 때일까.
‘말하지 않은 말’로 존재한다.
그 말은 표현되지 않기에
부서지지 않고,
온전히 마음에 머문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의 사랑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감정은 완성보다 기다림에 의해 정제된다.
그리고 약속된 공간
피렌체의 돔 아래에서,
그들은 시간을 꿰뚫는 감정의 깊이에 도달한다.
사랑은 도달의 감정이 아니다.
도달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사랑이다.
자크데리다가
부재의 흔적 속에 존재는 오히려 남는다고 했던 것처럼...
난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야스나리의 설국과 묘한 차이와 동시성이 함께 느껴졌다...
이 두 작품이 품고 있는 사랑의 본질은
‘닿기 직전의 상태’ 이지 않을까...
‘설국‘의 시마마라와 고마코,
’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준세이와 아오이,
그들은 모두 서로의 부재 속에서
닿지 못했기 때문에
더 오래 지속되는 감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너무 감성적일 수도 있고
허무를 미화시킬 수도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 두 작품에서 완결과 미완의 아이러니함이 느껴졌다.
완결은
뒤끝 없는 단절로 기억을 흐리게 하지만
미완은 시간을 붙잡는다.
『설국』의 눈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배경이자,
모든 감정을 정지된 상태로 남겨둔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바닥이 하얘졌다.”
너무나 아름다운 첫 묘사.
짧고 단정하지만 차갑고
스산한 아름다움이
응축된 정지된 풍경
그 차가움은 감정의 절제이며,
시마마라와 고마코의 사랑을
설명하기보다 바라보게 만든다.
반면,’ 냉정과 열정 사이‘의 피렌체는
기억과 열망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정지된 한 장면을 품고 살아간다.
다시 돌아오는 그날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
이 두 세계는 닿지 않는다.
설국은 차갑고,
피렌체는 따뜻하다.
하나는 멈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움직이는 기억이다.
그러나 그 둘은 본질에서 연결된다.
그것은 모두 “사라지기 전,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늘 그 경계에서 반짝인다.
끝나기 전,
시작되지 못한 채 말해지기 전,
오래 응시된 채..
사랑은
결국 서로에 대한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식하느냐의 질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너는 그것을 느꼈는가.
그 질문 하나로,
한 생은 충분히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 설국‘은 그 질문 앞에
멈춰 서있는 이야기다.
’ 냉정과 열정 사이‘는
그 질문을 오래 품고 기다리다 찾아가는 이야기다.
어쩜 우리 모두의 사랑,
때론 삶에 대한 질문도
어느 날,
어느 계절에서
늘
그 질문의 자리 앞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다음의 선택과 행동은 달라진다.
하지만 두 가지다 인생이다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