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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상혁 Jan 17. 2024

그녀의 이름은, 민주 투사.

4. 일상의 평온함을 바라며.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으나, 끝까지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작년에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면서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획대로라면 작년에 작업을 시작했어야 하나 직장 일로 1년을 미뤘다. 일을 미룬 사이, 나는 그녀를 자주 만났고 그녀가 걸어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97년이고 그때 나는 고3이었다. IMF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시기였으며 내가 18살, 그녀가 38살 때였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 ‘소설’을 꿈꿨고, 소설은 나를 둘러싼 가난하고 불행한 환경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고3이 되자마자 친한 친구가 자살을 하는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그때 나를 붙잡아 준 것도 소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고통을 참고 견디며 극복하는 법을 차근차근 배웠다.

 나는 야자를 빠진 적이 없는 얌전한 학생으로, 학교 교사들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교사들에게 반발하지도 않으며 학교 생활을 했다. 그러다 어느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6개월 과정의 ‘소설 창작 강의’를 수강하기 위해 당시 담임교사에게 협박하듯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야자를 못 할 듯해요. 000 신문사에서 하는 ‘소설 창작 강의’에 보내주지 않으면 자퇴하겠습니다.”

 단 한 번도 담임교사의 뜻에 거스르거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는 나였다. 그런 내가 담임교사를 바라보며 전쟁터라도 나가겠다는 듯이 결연한 자세로 야자를 빠지겠다는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했다. 말이 ‘야간자율학습’이지 그때는 ‘강제 야간 학습’이었기 때문에 야자를 빠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야자를 안 하고 도망을 갔다가는 다음 날 담임교사에게 얻어맞기 일쑤인 공포스러운 시대였다. 내가 함부로 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담임교사가 적잖이 놀란 눈치였으나, 내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서 담임교사도 진심을 읽었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목요일 2시간'만큼은 야자에서 빼주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친구의 자살로 인해 나도 따라 죽고 싶다는 말을 담임교사 상담 때 내뱉은 적이 있었다. 그날로 나는 '요보호 학생' 같은 처지가 된 상황에서 내 뜻에 따라주는 것이 더 큰 불행을 막는 길이라고 담임교사는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웬만한 이유로는 야자를 빠질 수 없는 시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야자 1교시만 하고 교문을 빠져나와 ‘소설 창작 강의’를 들으러 갔다. 그건 일종의 특권이었으나 나는 이것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아 다른 친구들의 복잡한 시선을 받았어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그때는 그래야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학창 시절 엇나간 행동을 것이 있었다면 아마 이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획된 ‘소설 창작 강의’ 6개월을 전부 다니지 못했고 4개월에 미치지 못하는 시간, 횟수로는 10여 회의 강의에 참석했다. 그러니까 그 시절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10여 회이거나 이보다 더 적은 횟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한 순간이 영원과도 같고 찰나의 시간이 인생의 반경을 바꾸기도 한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렇게 나름 중대한 결심을 하고 찾은 ‘소설 창작 강의’에는 40명 남짓의 ‘어른들’이 강의실에 빼곡히 모여 있었다. 당연히 고등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를 제외하고 가장 어린 축이 20대 중반이었고, 대부분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중후반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그 시절 30대 후반에서 40대는 중년의 나이라 고등학생인 나와는 상당히 간극이 느껴졌던, 그야말로 ‘어른’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나는 꼬마 중에 꼬마, 꼬꼬마로 보였을 것이다. ‘저 꼬마가 무슨 소설을 쓰겠다고 여기에 앉아 있나.’, 하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아예 관심 밖의 열외자로 취급받기도 했다.

 첫날 첫 강의 시간에는 수강생 모두가 한 명씩 강단에 나와서 자기소개를 했다. 다양한 직업군의 다양한 사람들이 겁도 없이 생업을 포기하거나 등한시하며 ‘소설’을 쓰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소설 쓰겠다는 어른들이 이렇게나 많은 사실에 놀라면서도, 소설이라는 문학에 심취해 있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한편으로는 큰 위안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소설을 쓰겠다고 하는 건 전교에서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정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꿈을, 어떤 사람은 강한 목표 의식과 포부를, 어떤 사람은 이런 강의에 과연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궁금해 참여해 봤다고 하며 크고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드러냈다. 나도 강단에 나가서 내 소개를 했고 어른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 나름 거창한 꿈을 이야기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창피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강단에 선 그녀가 단연 나의 눈길을 끌었다. 작은 키에 작은 몸집의 그녀였으나 말을 시작하면서 눈빛에서 빛이 돌아 반짝였고 말들이 응집을 해서 그녀를 감싸는 듯하더니 이윽고 강의실 구석구석이 그녀의 말들로 꽉 채워지는 듯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목소리는 높거나 낮지 않고 잔잔했으나 강단이 있고 힘이 넘쳤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흔들었다. 그녀의 감정이 살짝 고조되는 순간에는 그녀가 살짝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그 주먹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의지가 느껴졌다. 막힘없이 쏟아내는 ‘소설’에 대한 열정과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하는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그녀가 범상치 않은 존재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일컬어지는 서울역 대규모 시위 때 바로 그 현장에 있었으며, 그 뒤로도 학내 시위 제일 선봉에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는 것이었다.

 1980년, 그 엄혹한 시절에, 최승호 시인의 '북어'처럼 모두가 말의 변비증을 앓던 시절에, 빳빳한 지느러미로 막대기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던 시절에, 그 말라비틀어진 북어들 사이에서 그녀가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길고 긴 어두운 밤을 뚫고 빛이 있는 곳을 향해 헤엄쳐 나아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는 나는 어떤 충격 같은 것을 느꼈다. 말로만 듣던 '의사'나 '열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1980년 당시, 그녀는 겨우 21살이었던 대학생이었다. 가장 예쁘고 환할 나이에 가장 어둡고 무참한 시절을 보내며 정의롭지 못한 일에 침묵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스스로를 불태웠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 안에 초능력자 같은 특별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겨우 21살에 몸집도 작은 여대생이 군홧발로 짓이기는 폭력의 시대를 당당하고 의연하게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안에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기보다는 너무나 어이없고 기가 막힌 시대에서 취할 수 있는 당연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당시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와 다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설명이 불가능하다. 불만과 저항 의식이 있었다고 해도 '총'과 '칼', '폭력'과 '고문' 앞에서 가슴속에 품고 있는 ‘정의’를 입 밖으로 발설하는 것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말은 물론이요, 행동으로까지 옮기며 자신을 불태워 ‘당당히 불의에 저항했다는 흔적’을 남긴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 것은 분명했다. 그녀의 그런 희생정신이 그 뒤로 수많은 대학생들과 민중들을 각성하게 해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더욱 활활 타오르게 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나는 ‘소설 창작 강의’가 진행되던 000 신문사 한 편의 강의실에서 말로만 듣던 ‘아우라’라고 하는 상상의 빛이 자기소개를 하던 그녀에게서 번져 나오는 것을, 18살 인생 처음으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녀는 내가 18살 어린아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았다. 당시 소설 창작 강의를 듣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애였던 나를 열외로 생각하고 공부나 하지 소설은 왜 쓰려고 하냐고, 대학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다는 말을 주로 하며 나를 대화 상대로 보지 않았다. 솔직히 어른들이 말하는 세계를 내가 다 소화하지 못했고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야기도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소설 합평 시간이나 강의가 끝나고 이루어진 뒤풀이 자리에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저 어린애가 뭘 알겠냐는 듯이 나에게 핀잔을 주거나 내가 하는 말을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한마디 했다.

 “그러지 마. 상혁이도 다 컸어. 얘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야. 사람이 왜 그래? 00 씨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이 좋겠어? 상혁아,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말들 해. 괜찮아.”

  나는 그 후로 사람에 대한 ‘존중’의 중요성에 대해 곱씹어 생각하게 됐고,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경험이 다양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에 상관없이, 성별이나 학력에 관계없이, 내 앞에 숨 쉬고 있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에 대해 깨달았다.     


 당시 그녀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암 환자였다.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겪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겨두기 위해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소설 창작 강의’에 참여한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심이었는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겉으로 봐서는 크게 아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는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는 모습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녀는 목숨을 걸고 ‘소설 창작 강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내가 야자를 빼주지 않으면 고등학교 자퇴를 하겠다고 담임교사 앞에서 선언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결심을 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강의에 참석한 것이다. 강의의 1분 1초가 그녀에게는 얼마나 각별한 시간이었을지 그런 사실을 나는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서야 알게 되면서 숙연해졌던 기억도 있다. 천만 다행히 그녀는 항암 치료를 잘 견뎌주고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그녀가 면회를 온 적이 있었다. 일병 때였으니 갖은 고생으로 서러움이 넘칠 때였다.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초등학교 때부터 밥을 해 먹고 학교를 다녀 웬만한 고생은 다 견딜 줄 알았다. 그러나 늦가을에도 영하의 날씨를 기록하는 강원도 추위에, 훈련을 나가 찬물에 식판을 닦으며 손가락 끝 마디마디가 다 갈라져 피가 났을 때는 꽉 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때 그녀가 면회를 왔고, 주말 내내 고참들 눈치를 보는 속박에서 벗어나 나는 외박을 나갈 수 있었다. 속초항에서 그녀가 사주는 신선한 회를 먹으며 답답한 군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음에 감사해했다. 다음 날 부대에 복귀할 때는 서점에 들러 최근 발표된 소설가들의 소설집을 그녀가 내게 몇 권 사주었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그녀가 군대에서도 열심히 소설 구상하는 것을 잊지 말고, 습작도 멈추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이 경험들이 훗날 작품을 쓸 때는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도 하며 걱정과 안쓰러움, 따뜻함과 자애로움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잘 웃지 않는 편인데 나와 헤어지는 그 순간에는 살짝 미소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놓았다. 무척 따뜻한 손길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군대에서 제대 후에 그녀를 몇 번 더 만났지만 '소설 창작 강의'에서 꾸려진 '소설 모임'에서 그녀가 탈퇴하며 연락이 점점 뜸해지게 됐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생활 전선에서 바빴기 때문에 어느 순간 우리는 연락이 완전히 끊기게 됐다.     


 그러다가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뉴스 한 부분이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관련 동영상이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그녀가 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모습이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선연히 가슴에 와닿았지만, 화면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건강해 보여 나는 안심하고 안도했다. 나는 그때 유트브 뉴스 화면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누나가 건강하구나, 건강해, 그러면 됐다, 그러면 된 거야. 잘 됐다. 정말 다행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카톡 친구로는 그녀가 등록돼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멀리 떨어지기로 작정한 것처럼 연락을 딱 끊고 지냈다. 오래 시간이 흘러 나는 1997년 000 신문사 강의실에 모였던 ‘어른’의 나이를 훌쩍 넘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소설’ 때문이었다. 그녀는 000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식당에 손님으로 오는 청년과 가까워졌는데, 그녀의 예사롭지 않는 말과 행동에 손님으로 온 청년이 자신이 소설가를 꿈꾸는 습작생이라고 고백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어달라고 했다. 문득 내 생각이 났던 것인지 그녀가 나에게 손님의 소설을 한 번 읽어봐 주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했고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우리는 어제 만났다가 헤어진 것처럼 다시 만났다. 10년 정도 만나지 못하고 산 듯했으나 1, 2년 정도 헤어져 있다 다시 만난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 사이 그녀는 60이 넘었고, 나는 40이 넘었다. 만나자마자 뒤죽박죽 지난 10년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고, 그 사이 내가 소설 쓰는 사람이 됐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 첫 단편집을 그녀에게 건네며 나는 무척 감사한 마음이었다. 생업에 바빠 문학과는 멀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그녀가 말하면서 나를 건너다봤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의 눈빛은 1997년 신문사 강의실에서 처음 보던 것처럼 여전히 빛이 났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그녀를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네가 대신해 줄래? 광주 때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이 얼마나 참혹한 현실을 견뎠는지, 비루하고 비참한 순간을 얼마나 위엄 있게 통과했는지, 아무도 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너무 불쌍하잖아.”

 “네, 제가 할게요, 누나. 제가 해볼게요.”

 그때 무슨 자신감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가 살아온 삶을 써보겠다는 다짐을 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럴 능력이 되나, 더 유명하고 훌륭한 작가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은 나중에서야 진지하게 했었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는 그저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어떤 책임감과 사명감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은 나에게는 '영예'이며, 그녀가 나를 지명해 준 것은'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년에 그녀와 제주도와 땅끝마을, 전라도 일대와 경기도 일대를 여행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많은 사찰을 방문했고, 풍경 좋은 곳을 나란히 걸었지만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 역시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도 하고 사진 속의 내 얼굴이 실제 내 얼굴과 다른 듯해서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녀와 찍은 사진이 없나 찾아보다 우연히 제주도 어느 바닷가에서 그녀와 내가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같이 여행 온 그녀의 아들이 찍어 준 사진을 발견했다. 그녀와 나란히 찍은 유일한 사진, 날씨가 좋아 바다가 눈이 시리게 푸르렀고 바다에 윤슬이 반짝였다.     

 내가 쓰게 될 그녀의 이야기, 그중에서 하나의 문장을 그즈음 써냈고 이 문장으로부터 출발하려고 한다. 아마 마지막 문장이 될 듯하다.     


 은하수가 강을 이루는 하늘을 보는 연의 눈빛이 빛났다. 연의 눈 속에 은하수가 흘렀고, 그녀가 지키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담겨 있었다. 연이 오랜만에 웃었다.      


 완성된 소설 속에서 이 문장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다른 문장들과 어우러질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이런 문장을 생각할 수 있게끔 한 것은 모두 그녀의 공이며,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소설가로서의 사명과 의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정의(正義)’에 대한 이야기,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에 대해 내가 과연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지 솔직히 겁이 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본다. 소시민에 머물고 있는 ‘나’지만 나 같은 소시민이 하나 둘 ‘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의 의미가 충분히 있다고 말이다.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온갖 구질구질하고 비참하고 참혹한 현실이 겹쳐 덮친다 해도 누군가 끊임없이 옳은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 상식과 배려, 존중과 사랑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하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 일을 내가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의 장면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이루어내길 꿈꿔본다.

 결국은 18살 어린애에 불과했던 ‘나’를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귀한 사람으로 존중해 주었던 ‘그녀’에게서 출발한다. 나이의 많고 적음, 지식의 얕고 깊음, 경험의 다양함과 부족함을 넘어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의 ‘사람에 대한 존중’이 우리가 말하고 싶어 하는 ‘정의’의 시작이고 그것을 나는 고등학생이던 18살에 그녀에게서 배운 사실로부터 더듬어 갈 생각이다. 길게 펼쳐진 길 위에서 걸음걸음마다 그녀와 그녀와 같이 젊음을 불사르며 옳은 것을 위해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존재들의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말이다.


 '투사'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정의로운 일을 위해 나서서 목숨을 바쳐 싸우는 사람.     

 

 그녀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시대를 불꽃처럼 살아낸 사람이다. 공룡 같은 세상에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민족과 국가를 자신의 안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선의 극치'에서 볼 수 있는 세상과 만나고 그 세상을 그녀와 그녀가 지키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누려고 했기에 나는 그녀에게 존경을 넘어 경의를 표한다. 스무 살 빛나는 나이에 민주주의라는 대의와 민중을 위해 싸워온 그녀 삶, 두 아이를 키워내며 생활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면서도 주변을 살뜰히 챙기고, 식당을 경영할 때는 손해인 줄 알면서도 좋은 식재료를 손님들께 제공하며 선향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그녀, 시위의 현장에서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삶의 현장에서도, 그녀는 그녀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굴복하지 않고 투사로 살아왔다.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정의로운 일을 한 사람들을 ‘의사’, ‘열사’, '지사', ‘의인’이라고 한다. 그 명칭은 아무에게나 붙일 수 없기 때문에 귀하고 소중하며 눈이 부시게 빛이 난다. 그녀에게는 무척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은, 민주 투사이다.


                                                                                                                       사진 제공: Y.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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