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이면 모든 새로운 것들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한국에서 대기업 N사, 20여 명 규모 스타트업, 게임회사 K사를 거치며 어느덧 6년 차 개발자가 된 나는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아메리칸드림의 꿈을 안고 도착한 미국은 정말 차가운 곳이었다. 180개가 넘는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단 15개 회사에서만 내게 관심을 보내줬고, 그중 단 한 곳에서만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3개월 만에 취업한 내 사례는 나름 미국 내에서도 성공한 케이스이다. 지금 시장상황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들 한다. 그렇게 파란만장하던 미국의 무직 개발자로서의 시간이 흘러, 미국에 온 지 5개월 만에 나는 드디어 실리콘밸리 회사의 개발자가 되었다.
3개월간의 미국 취업기는 '나는 미국의 무직 개발자' 시리즈에서 읽을 수 있다. https://brunch.co.kr/magazine/engineer-in-us
꿈꾸던 회사에서의 삶을 기대하며 여유롭게 보낼 마지막 백수생활은 생각보다 짧았다. 백그라운드 체크를 거치고, 한국을 다녀오고, 도와준 이들에게 인사도 하고 나니 겨우 입사 2주 전이었다. 부랴부랴 노트북과 웰컴키트(Swag이라고 한다)를 받을 주소를 입력했고, 입사 전 주 금요일에 겨우 필요한 노트북과 swag를 받았다. 회사의 swag을 더 기대했던 나는 별 감흥 없이 노트북을 열었고, 내가 한국에서는 받아본 적 없는 최고사양의 노트북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노예도 대감집 노예가 최고인가? 하지만 기대했던 swag는 꽤 평범했다. 그래도 신기했던 것은 온보딩 가이드나 회사 가치등이 적힌 책자가 함께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회사 로고가 박힌 티셔츠 등을 기대했는데 그런 건 직접 사야 할까 보다.
이번 회사는 풀리모트 회사이다. 덕분에 나는 콜로라도에 있는 가족과 집을 두고 저 멀리 샌프란시스코로 혼자 이사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본사 오피스는 방문해보고 싶었다. 회사 사원증도 받고 찍고 들어가서 내가 이 회사의 일원임을 당당하게 증명하고 어깨도 좀 세우고... ^^ 이 회사 오퍼를 받고 리크루터에게 혹시 오리엔테이션은 오피스에서 하는지, 방문할 기회가 있는지 물어봤다. "아니 첫날부터 집에서 온라인으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면 돼!" 오피스 방문하고 싶다면 내돈내산 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사원증도 없다!
풀리모트 온보딩은 생각보다 많이 어렵다. 비록 나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풀리모트 경험을 해봤지만 온보딩을 리모트로 하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온보딩 때 팀원들과 밥 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해지는 것을 좋아하는데 온라인상에서는 영 쉽지 않다. 누가 뭘 하는지도 옆자리에 있으면 곁눈질하고 어깨너머로 주워들으며 눈치코치 알아가는 편인데 여기선 내 오감과 눈치를 이용해 먹을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근한 것 같지가 않다. 자고로 첫 출근은 오피스 가는 두근두근하는 이벤트여야 하는데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 회사에서 받은 노트북을 키는 것뿐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일을 한 것이 5개월 전이고, 그동안은 평일-주말 없이 원할 때 일어나 공부하고 원할 때 자는 삶을 살아왔다. 이 백수의 루틴(백수가 아니라 취준생이라 표현하고 싶지만)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주에 5일 아침 일찍 일어나 8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어색해져 버렸다. 무려 6년이나 해온 루틴인데도 5개월 만에 무지랭이가 되어버렸다. 반면에 퇴근이 있는 삶이 된 것은 정말 기쁘다. 취준생 동안은 퇴근 없이 계속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는데, 이제 명백히 퇴근이 있는 만큼 근무시간이 아닌 동안은 온전히 쉴 수 있다. 비록 이 퇴근이 있는 삶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회사는 교육 프로그램이 정말 많다. 내가 한국에서도 대기업은 다녀봤지만 공채 채용이 아니라 그런가 회사 차원에서 진행하는 공식 오리엔테이션을 접해본 적이 없다. 비교대상은 따로 없지만 내 기준 정말 다양하고 많은 세션이 있다. 기술에 대해서도 내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세션도 있다. 어떤 세션은 잘 준비된 것도 있고, 어떤 세션은 잘 준비되지 않은 것도 있더라. 또 어떤 강연자는 능숙하게 큰 그룹을 잘 다루지만, 어떤 강연자는 떠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 회사에서 강연 담당자로 나올 정도의 사람도 긴장하고, 잘 준비하지 못하기도 한 모습을 보면서 이 회사의 강연자도 저런데, 내가 좀 절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회사는 1:1 미팅을 참 많이 한다. 많은 실리콘밸리의 회사가 그런 것 같은데, 우리는 풀리모트로 일하다 보니 그런 1:1 미팅이 더 많은 것 같다. 우리 팀 매니저가 버디를 정해줬는데 나는 버디와 당분간 주 2회씩 30분짜리 1:1을 하기로 했다. 매니저와는 주 1회씩 1:1을 잡았다. 다른 팀원들의 캘린더를 보니 매니저든, IC든 주기적인 1:1이 굉장히 많았다. 다른 팀 멤버와도 하기도 하고, 다른 직군과도 하기도 한다. 버디나 매니저와의 1:1을 통해 궁금한 것을 바로바로 물어볼 수 있어 온보딩에 많은 도움이 된다. 또 나를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물어볼까 말까 한 것도 부담 없이 물어볼 수 있어 좋다.
첫 임무는 팀원들과 1:1을 하는 것이었다. 첫 주는 이래저래 교육 듣고 적응하느라 바빠 버디나 매니저 외 팀원들과 일정을 잡지 못했다. 2주 차부터 슬슬 요청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영어에 대한 부담 때문에 평소 나와 달리 1:1 요청을 하는 것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일단 좀 더 편하게 느껴지는 멤버를 중심으로 하나하나 잡아갔다. 아, 역시 영어로 일상 대화를 하는 것은 또 다르게 어렵다. 모르는 사이고, 또 내 입장에서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대화를 잘 주도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함과 동시에 영어로 말을 꺼내는 건 뇌에 과부하가 걸린다. 두어 번의 1:1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후 나는 말할 거리를 미리 생각해 가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할지 좀 정리하니 그다음 멤버와의 1:1은 나름 괜찮았다.
일을 하며 영어를 좀 써보니 확실히 인터뷰할 때와는 다르다. 물론 아직 영어로 업무 대화를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선 듣기는 내가 이 회사에서 사용하는 용어 등을 모르다 보니 더 잘 안 들리는 것 같다. 회사에서 쓰는 용어가 익숙해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해본다. 또 멤버들 중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것 같은 멤버들도 있어서 전반적으로 팀의 영어가 너무 빠르거나 어렵지는 않다. 읽기는 비교적 괜찮기는 하지만 모든 메시지나 문서가 영어도 되어있다 보니 평소처럼 쓱 보고 이해할 수 없어서 좀 답답하다. 번역기를 사용하는 일이 늘었다. 좀 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멤버들이 사용하는 캐주얼한 글이 낯설기도 하다. 아, 또 생각보다 문법들은 정확히 안 쓴다. a 나 the 같은 것들은 많이들 줄여서 쓰는 것 같다. 말하기에서는 의문형의 말을 잘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미국 사람들은 좀 돌려서 물어본다고 하는데 나는 돌려 돌려 말하기엔 아직 내 영어실력이 짧아 짧은 말밖에 안 나온다. 그리고 빠르게 생각하며 말하다 보면 어순이 제멋대로일 때가 많다. 평서문으로 말하다가 급하게 끝에만 올리곤 하는데 듣는 입장에서 확실히 내가 물어본 건지 잘 모르더라. 영어 공부를 조금씩 해봐야겠다.
나는 2주 동안 많이 물어보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버디나 매니저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 다른 팀 멤버에게도 물어봤다. 온보딩을 풀리모트로 하다 보니 내가 이것저것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다. 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으면 그냥 물어보는 것이 팀의 히스토리 파악에도 도움이 된다. 나는 그동안 팀에 새 멤버가 들어오면 항상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눈으로 우리가 못 발견한 에러나 불편한 점을 발견해 달라 부탁한다. 새 멤버가 또 무뎌지기 전까지의 기간을 잘 이용하면 많은 개선점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 또한 이번에 이해되지 않거나 이상한 것이 있으면 꼭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 덕분에 첫 주에는 서비스의 UI 에러를 찾아 다른 팀 슬랙 채널에 리포트했고, 첫 버그 티켓을 만들었다. 또 올라오는 PR들을 유심히 보다 버그성 코드를 찾아 첫 코멘트를 남겼다. 둘째 주에도 PR 코멘트를 남기고, 개선점을 찾아 아이디어 노트를 만들어 매니저와의 1:1에서 공유했다. 또, 다음 달 새 멤버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온보딩하며 모은 팀과 회사에 대한 정보를 문서화하여 전달하자고 제안했다. 매니저는 좋은 피드백을 줬다. 또 온보딩 경험 노트는 함께 정리해 다음 신입 멤버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나만의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다.
멤버들은 온보딩에 대한 팁으로 많이 물어보라고 한다. 또 아직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왠지 빨리 일을 맡아서 내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조바심이 든다. 내 어리숙한 영어 때문에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된다. 내가 익숙한 코딩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좀 더 임팩트를 줄 수 있을 텐데. 이번엔 다행히 작은 태스크를 받았다. 빨리 코딩을 하며 내 실력을 보여주고 싶다. 더 많은 프로젝트에 합류해 더 빠르게 아직 모르는 것들을 지워내고 싶다. 미국 회사들은 아시아 회사와 다르게 좀 chill 하는 편이라고 하지만, 아직 내 머리는 chill 하기에 열심히 하는 업무 문화에 절여져 있다. 그래도 태스크를 하나라도 해내면 마음이 좀 편안해질까. 다음 주에는 태스크를 하며 자신감도 찾고 아침 일찍 일어나 8시간 일하는 루틴에도 익숙해지고 싶다. 아, 그리고 영어에 대해 부끄럽더라도 계속 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