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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Jul 19. 2022

마음의 문

Karu's Novel Series A

  은서와의 살벌하던 상담이 끝났다. 이제 지현이를 마주해야 할 때가 왔다. 최소한 잘못된 것만큼은 바로잡아야지. 우리 사이가 예전만큼 좋아지진 않더라도, 서로의 오해는 풀어야 한다. 오해가 쌓일수록 서로에 대한 불신만 커져갈 뿐이다. 은서는 그걸 보게 해 줬다. 우리가 잊고 지내던, 우리의 맹점들을. 그걸 해결하는 건 우리 둘 만의 몫이다. 남들에게 의지할 만한 게 아니다.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내 존재는 대체 뭐야?'

  '우리가 무슨 관계야?'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무슨 사이였을지. 난 얘한테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지. 그러나 생각할수록 내 가슴만 아려온다. 어쩌면 난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제부턴가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날 노골적으로 쳐내는 게 눈에 보였다. 그 뒤로는 네가 했던 사소한 장난들도 도저히 받아주기 힘들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어느 때보다 조용히 너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에게도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다. 분명 내 수동적 공격 성향도 지현이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걸 안다. 아는데, 왜 자꾸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대는 걸까. 솔직히 지금 널 다시 만난다고 해도 잘 모르겠다. 내가 널 불러내긴 했지만, 분명 나는 무의식적으로 너에게 상처를 주길 원할 것이다.


  "문서준."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경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한지현...."


  일부러 눈을 매섭게 떴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표정 대부분은 가려지니까. 눈만이라도 적대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너의 직접적인 잘못은 아니라고 해도, 난 너와의 관계를 끊고 나서 많은 후유증에 시달렸다.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팔을 그었다. 내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 발작이 동시에 찾아와서 항우울제와 신경 안정제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있다.


  친구가 뭔가. 사랑이 뭔가. 때로는 잘 사귀고 있는 애꿎은 커플들에게 화살이 돌아가기도 한다. 참 행복해 보여서. 나처럼 사랑에 목 매여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있다니. 조세은, 송하진. 너희가 행복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뿐이다.


  "왜 불렀냐?"


  예상대로 지현이의 말투는 가시가 돋쳤다. 예전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발작을 일으키려던 몸을 간신히 억누르고 천천히 다가갔다.


  "넌 나한테 할 얘기 없어?"

  "없는데."


  선택지가 두 가지 있다. '그럼 나도 할 얘기 없어. 돌아가.'라고 하는 것과 내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나가는 것. 다시는 안 볼 사이라면 전자가 현명하다. 이미 관계가 끊어진 마당에 뭐가 아쉬워서 기존에 겪었던 고초를 털어놓는단 말인가. 이건 과거 사람으로서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사람이 정말 소중하고 놓치기 싫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은서와의 상담에서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어쩌면 우리 둘 다 아직 마음의 문을 닫고 있진 않을 것이다.


  짧게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난 많아."




  "진짜 솔직하게 말하는 거다?"

  "... 그래."


  카타르시스 대화.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밑바닥부터 파헤쳐야 한다. 그걸로 인해 우리가 또 다른 상처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깊이 남은 흉터를 직면하고 치료해야 한다. 그 위에 무언가를 쌓다가는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다.


  "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야. 분명히 너에게 기회를 줬어. 그런데 넌 그걸 무시했지. 그리고, 지금 나도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우리가 서로를 자기보다 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 우리가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


  지현이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목소리도 조금씩 울먹거리는 게 느껴진다. 난 그저 그걸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먼저 널 쳐냈어. 더 이상 너랑 가까이 지낼 수가 없어서. 네가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 난 너를 위해서.... "

  "야."


  참았다. 나도 계속 참고 있었다. 지현이의 입에서 저 말만큼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랬는데.


  "나를 위해서?"

  "..."

  "그게 나를 위한 거야?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쳐내는 게 친구로서 할 짓이야? 우리가 그런 사이밖에 안 됐어? 그럼 나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버린 널 보고 난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는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그냥 친한 남사친, 여사친이었을 뿐이야. 그래도, 친구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거야. 연인만큼은 아니겠지만, 서로에게 갖춰야 할 예의가 있는 거고, 그만큼 챙겨줄 필요도 있는 거라고."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터져 나온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는 나조차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소리를 계속해서 질러대고 있었다.


  "행동하기 전에는 몰라. 상대는 알 방법이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해도 상대가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이기적인 생각이야."

  "너는..."


  지현이가 쥔 오른손이 가늘게 떨린다.


  "너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사람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우리는 한참을 어긋나 있었다. 이제는 그 현실을 마주하는 것조차 두렵다. 또 상처를 입을까봐. 예전에 만났던 그 아이의 자살 소동 뒤로,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온전히 열지 못하게 되었다. 천천히 친해져서 내 일부가 되었다가, 사라져 버리면 난 무너진다. 젠가 놀이와 같다. 어설픈 관계의 친구라면 끊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 끊어진다면, 결국 나라는 사람도 무너지게 될 테니까.


  내면을 보는 건 잔인하다. 우리의 상처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았고, 천천히 썩어 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지현이도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다. 그저 우리가 서로 맞지 았을 뿐이다. 우리가 가진 트라우마 때문에.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남겨버렸다.


  "지현아."

  "......."

  "너도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겠다."


  지현이가 고개를 숙인다. 사람이 싫은 게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이 싫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서로를 기피해왔다. 증오해왔다. 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사회는 만만하지 않다. 혼자서 헤쳐나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게 현실이다. 우린 분명히 서로를 누구보다 의지해왔다. 그런 사람이 한순간의 실수로 사라졌으니,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지냈을까. 내 착각이어도 좋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다시 마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서준아."

  "어?"

  "미안했어.. 정말로... "


  울먹이며 사과하는 지현이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분명히 맺힌 게 많았을 것이다. 더 이상 건들지 않기로 했다. 살짝 어색하게 뒤로 다가가서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리고 조용히 옆에 가서 앉았다. 이 상처를 통해 우리가 더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우리는 이미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 일들을 다시 반복할지 말지는 우리의 손에 달렸다.


  '이해받고 싶었어.'


  어쩌면 우리 둘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 아니었을까.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못했지만, 상대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어두운 면을 상대에게 꾸밈없이 털어놓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가까운 사이기에 더 힘든 경우도 있다. 상대에게 괜히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난 너를 위해서...'


  문득 지현이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분명 이 말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나를 위한다는 게, 정말 나를 위해서였을지 의심이 가서. 무엇보다, 나에게 물어보지 않고 판단한 '나를 위한 행동'은 결국 나에게 아무런 좋은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상황만 악화시켰을 뿐이다. 그래도, 지현이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분노가 차긴 하지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더 이상 과거의 행동에 나를 옭아매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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