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만큼 무게 없이 휘날리던 바람들
“이거 아빠한테 비밀이야. 아빠 알면 엄마 죽-어.”
지금 우리 엄마가 생기기 전, 보통 다들 엄마가 있을 그 어릴 적에, 나에게도 엄마 같은 게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배에서 나왔고 그녀의 흔적이 내 얼굴에 남아있으며 그녀의 체질을 닮아 지금도 꽤 고생스럽다. 성장기가 끝나고 이목구비가 다 자리 잡은 내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끔 그녀의 얼굴이 조금 기억나는 것 같기도 했다. 겨우 5-6살 난 애기 주제에 씻겨주는 것도 싫다고 하는 환멸 가득한 내 눈을 보며, 그 엄마 같은 사람은 친히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처음 그 집으로 이사했던 날, 싱크대 아래 찬장에 귀해 보이는 꿀이 있었다. 벌집에 꿀이 가득 차 있는 채로 가공된 형태였는데, 그녀가 낼름 집어 우리 입에 하나씩 넣어줬다. 나는 먹어도 되는 거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전 주인이 두고 간 것이라 괜찮다고 했다. 벌집을 한 움큼 통째로 먹어본 것은 처음이었고, 아주 맛있진 않았지만 분명 특별한 맛이었다. 나는 아빠도 먹어야 하니까 남겨두자며 그대로 그 자리에 두고 찬장 문을 닫았고, 이틀 정도 지나고 다시 열었을 땐 이미 꿀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사실 기억나는 것은 며칠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며칠엔 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맞고인지 고스톱인지 부르는 사람마다 다르게 부르는 화투 게임을 종일 붙들고 있었고, 버디버디로 애인과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 애인이라는 사람은 나한텐 그냥 모르는 아저씨였고, 컴퓨터 왼쪽 벽 위에 가로로 길게 나 있는 그 구멍을 통해 나는 종종 그를 내려다봤다. 그럴 때면 그녀는 나와 나보다 두 살이나 더 애기인 동생을 두고 나가곤 했다. 우리 둘 만을 두고 나갔다. 그 시간 동안 동생과 나는 침대에서 뛰어놀았고, 동생에게 큰 티셔츠를 입혀주는 원피스 입기 놀이 같은 걸 했다. 가장 큰 침대가 있고 작은 티비도 놓인 안방 벽면에는 달마가 그려진 크고 긴 액자가 걸려있었다. 달마는 무섭게 생겼었고, 나는 그 옆을 지나다닐 때면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동생은 달마를 무서워하지 않았고 자주 땡깡을 피웠다. 우리는 안방 침대 옆 작은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초라하고 작은 창고에 망태 할아버지가 산다고, 말 안 들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혼내주러 온다고 얘기했고 동생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와 동생은 딱 그만큼 어렸다.
더 어릴 적이었는지, 거실이 있고 큰 소파가 놓여있던 좀 더 넓은 집에 살던 때가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매일 텐텐을 하나 이상씩 못 먹게 하라고 일러두곤 밖에 나갔다. 자주 그랬다. 어느 날은 동생과 내가 티비에 나오는 오세암을 보고 함께 울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집에 없었다. 나는 밥을 먹고 나서 반찬을 냉장고에 하나씩 가져다주기도 했고, 그때는 열무김치를 좋아해서 밥 없이 맨손으로 집어 먹기도 했다. 그때 익힌 김치를 하도 먹어서 지금 익은 김치를 싫어하나.
나는 어릴 적부터 동물들과 함께하곤 했는데, 그 좀 더 넓고 거실이 있고 큰 소파가 있는 집에 살던 동안에 강아지를 총 3마리 키웠다. 처음에 키운 강아지는 요크셔테리어 캐피였는데, 캐피라는 이름은 내가 지어줬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해피라는 단어를 들어왔고 그게 우리말이 아니란 것 정도 알고 있던 것 같다. 왠지 멋져 보였지만 그렇다고 원래 있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가 우리 소중한 강아지에게 붙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비슷하지만 다른 캐피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캐피는 나를 좋아했다. 여느 요크셔테리어가 그렇다고 하듯 캐피는 말썽쟁이였지만 그래도 나를 아주 좋아했다. 캐피는 저 멀리에 있었어도 내가 박수를 두 번 치면 나에게 달려왔다. 그 작은 몸뚱아리로 앉아있을 적이면 거실은 마치 널따란 황야 같았고, 캐피는 갈색과 검은색이 잘 범벅된 털을 휘날리며 광야를 건너 나에게 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늘 어른들의 시선을 살피곤 했는데, 어른들은 거의 모두 관심이 없었다. 그녀만 나를 보거나 캐피를 보거나 웃거나 그랬다. 캐피는 어느 날 사라졌다. 아직 제대로 된 1인분이 아니었던 어린 나이의 나는 캐피가 왜 사라졌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 그러고는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다른 강아지가 우리 집에 왔다. 아주 까만 털을 가진 강아지였고 무슨 테리어라고 했던 것 같다. 나는 토토라는 이름을 지었고, 이 이름은 온전히 나 혼자 지은 이름은 아니었다. 토토는 너무 짧은 기간만 우리랑 함께했다. 별안간 어느 날 아빠는 토토를 아빠 친구분께 데려다주고 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잠시 우리 집에 토토를 맡겨두셨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그때 나는 조금 슬퍼했다. 그다음에 데려온 강아지는 우리 집 아파트 현관 1층에 버려져 있던 강아지였다. 해가 진, 저녁인지 밤인지 했던 어느 날 나와 동생이 그녀와 함께 집 밖으로 나온 일이 있었다. 잠시 슈퍼마켓에 들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나올 때 현관 1층에 웬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꼬물거리는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나와 동생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고, 그녀는 우리가 다녀오는 동안에도 이 아이가 있으면 집에 데려가자고 했다. 나는 그 아이가 아직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돌아왔고, 걔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애에게 하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그 애는 눈도 못 뜨고 젖병에 주는 우유를 겨우 받아먹었다. 그러던 그 하양이가 조금씩 자라서 집 안 전체에 꼬물거리고 있을 때쯤 하양이는 아빠 친구분 집으로 갔다. 아빠는 친구분이 강아지를 늘 키우셨고 많이 키우시는 분이라 걱정 말라고 했다. 나는 조금만 걱정했다. 강아지들이 사라지고 조금 슬퍼하는 동안 그녀도 같이 조금 슬퍼했단 건 하양이까지 떠나고 나서 알았다.
명절마다 친할머니댁에 가면 우리는 영락없는 손님이었다. 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예뻐해 주셨지만, 나보다 동생을 훨씬 예뻐해 주셨다. 아빠는 여전히 아빠였고 어른이었지만 할머니 댁에서만큼은 그래도 아들이 되곤 했으며, 그녀는 늘 겉돌았다. 친할머니댁에는 기다란 복도가 현관 기준 오른편 끝 화장실부터 왼편 끝 안방까지 죽 이어져 있었는데, 오른편 끝부분에는 선반이 있었고 거기에는 조각상들과 거울이 있었다. 그녀는 자주 그 끝 편 화장실 앞을 서성댔고 고모가 자꾸 그녀를 찾으러 왔다. 고모는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고, 그녀는 고모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 시절 나는 하인들만 아가씨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나에게 아가씨는 공주님 비슷한 호칭 같은 것으로 들렸다. 왜 그녀가 고모에게 항상 아가씨라고 하는지가 의문이었고, 나는 그녀가 괴롭힘 당한다고 느꼈다. 대부분은 고모가 무서웠고 그녀가 애틋했지만, 가끔은 그게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 댁에 가면 자주 그 복도 오른편 끝 쪽을 기웃거렸다. 고모는 나를 좋아하셨다. 고모는 피아노를 아주 잘 치셨는데 나는 피아노 치는 고모의 뒷모습을 좋아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팔을 내리치는 그 역동적인 모습은 한때 내게 그 무엇보다 멋이었다. 나는 고모가 없는 방에서 피아노 위에 앉아 그 모습을 오래 흉내 내곤 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가끔 어른들께 들켰던 것 같다. 고모는 나에게 무서운 어른이자 멋진 어른이었다. 고모를 보는 반짝거리는 내 눈을 그녀도 봤고, 나는 그녀에게 고모가 괴롭히냐고 직접적으로 묻기도 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나에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웃음이 진짜라고 믿진 않았다.
그 집에서, 달마가 있고 망태 할아버지가 이웃이던 그 집에서, 어른들은 큰 소리가 나는 싸움을 두어 번 했다. 다 같이 한 침대에 누워 천국의 계단을 보던 그 시간에 어느 날에는 휴지를 집어던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렸고, 뭐라 알아들을 수는 없는 비난 같은 것들이 오갔다. 그날 새벽에 결국엔 그녀가 집을 떠났다. 나랑 동생을 자기 몸 양쪽으로 눕히고, 동생에게 엄마가 없어도 언니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오늘까지 그녀를 볼 수 없겠다는 것을 꽤 명확하게 짐작했다. 조금 자라고 나서 곱씹어보니 원인 제공자가 나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겨우 여섯 살 난 나는 썩 눈치가 좋은 편이었고, 이따금 그녀가 애인과 통화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은 어디로 놀러 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걸 나누는 것 같았고, 며칠 뒤 그녀가 친정에 다녀온다며 집을 나선 날에 나는 아빠에게 쪼르르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집을 떠난 이후 아빠는 몇 차례 동생과 그녀가 통화할 수 있게 해 줬지만, 나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딱히 미운 감정도 화가 나는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달갑지 않았다. 맨날 나가서 일하느라 나와 자주 함께 있지 못했던 아빠가 전보다 좀 더 애틋해졌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약했다. 어리고 무책임했으며, 이기적이었다. 겨우 스물여섯에 나를 낳았고 스물여덟에는 아이 둘 가진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서른둘에는 외로웠고 우울했고 바람을 피웠다. 모성애는 본능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학습에 의한 책임 같은 것에 가까웠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은 견뎌내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임신은 별로 축복이 아니었고, 여섯 살 난 아이가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어른 비슷한 게 되어갈수록 어른이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배신감과 동시에 인간이 그럴 수 있다는 동질감을 수확했다. 그럴 수 있었다. 그래도 되는 것과 그러면 안 되는 것의 문제보다 앞서 있는 것이 그럴 수 있다는 그 사실이었다. 나는 언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길 바랐고, 언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길 바랐고, 언제는 그래서 그랬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