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해야 한다. (몇몇 성인聖人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일반적인 인간은 타인의 불행을 흥미로워 하는 악마적인 구석이 있다. 물론 그 불행이 엄청난 비극이어서는 안된다. 적당한 불행이어야 한다. 2024년 KIA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을 때, KIA팬들은 이렇게 말했다. "타이거즈는 한국시리즈에 안 올라갔으면 안 올라갔지 가서 진 적은 없다." 이 말을 들으면 누구나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들 법 하다. '그럼 이젠 질 때도 됐네.' '지는 거 한 번은 보고 싶네.' 이런 악취미는 누구에게나 있다. (자꾸 '누구에게나'를 강조하며 나 자신의 이야기를 물타기 하고 있음을 느끼신다면 꽤나 예리하신 분이다.)
2016년 메이저리그 시카코 컵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이상한 허탈감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철옹성 하나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불행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통이었고, 역사였다. 괜히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난 자료 몇 장을 찾아본 이후 고개를 세게 저으며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털어냈다. 백발의 노인 분이 야구가 이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사진이었다. 평생 기다려온 소식, 누가 그 간절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제야 난 그런 기다림 앞에서는 박수를 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다.
2023년 KBO에서도 하나의 저주가 끝났다. LG 트윈스가 29년만에 기다리던 우승컵을 들었다. 우승의 순간 관중석에서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구단주가 무언가 보고를 드리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진도 유명세를 탔다. 우승 MVP 보너스로 준비되어 있던 1억원 상당의 롤렉스 시계 주인공은 오지환으로 결정되었다. 오랜 한을 풀기 위해서 공들인 시간만큼 그들이 최정상에 머물 시간도 길 것으로 보였다. '왕조'선언은 오만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 공성보다 수성이 더 어려운 게 요즘 KBO판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며 LG는 정상에서 내려와야 했다.
1. 선발투수진
엔스는 나쁘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투수였다. 나름 이닝을 소화하면서 선발진의 중심을 잡아줬지만 상대를 압도하는 에이스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즌 중반까지 동행을 이어갔던 켈리는 잠실 예수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결국 부활을 하지 못하고 교체가 되고 말았다. 물론 아쉬운 이별이었지만 LG트윈스 팬들에게 켈리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거라 생각한다.
초반 LG팬들의 뒷목을 잡게 했던 임찬규는 후반기의 에이스 모드로 거듭났고, 포스트시즌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공을 어떻게 던져야 하는 건지에 대해 도가 튼 도사 같은 모습이었다. 손주영은 강력한 구위를 앞세우며 LG트윈스 국내 선발진의 미래가 자신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걸 당당하게 외쳤다. 문제는 최원태였다. 2023시즌 우승의 마지막 퍼즐로, 우승 청부사로 모셔온 최원태는 정규시즌에서나 포스트시즌에서나 팬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특히 포스트시즌이 심했다. 정규시즌에서야 퐁당퐁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포스트시즌에서는 혹시나 하고 시작했다 결국 역시나로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켈리의 대체 외국인 선수로 온 에르난데스는 사실 선발로서는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세부지표에서는 엔스보다 나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은 엔스의 성적이 애매하기 때문이었지 실상 에르난데스가 과연 좋은 투수인가는 개인적으로는 의문이 든다. 물론 그가 포스트시즌에서 불펜으로 뛰면서 보여준 투혼은 재계약을 하기에 걸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리 짧은 포스트시즌이라 한들 재계약을 할 투수를 그렇게 굴린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2. 구원투수진
2023시즌 LG트윈스는 한국시리즈에 선착을 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올라오는 팀을 기다리는 꽤나 유리한 입장이었으나, 1선발 노릇을 해주던 플럿코의 이탈로 인해 큰 불안요소를 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아무리 LG가 여러 부분이 강력하다 한들 외국인 1선발이 없어서 꽤나 고생을 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기우였다. 강력한 타선도 타선이었지만 LG트윈스는 두꺼운 불펜진의 힘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물론 완벽한 건 아니었다. 특히 마무리 고우석이 예전보다는 부진했고, 자주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김진성을 중심으로 유영찬, 함덕주, 정우영, 박명근에 최동환, 백승현, 이우찬, 이정용 등 상대방으로서는 뚫어도 뚫어도 뚫리지 않는 인의 장막같은 느낌의 불펜진이었다.
2024시즌을 앞두고 고우석은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하더니 손윗처남인 이정후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이정용은 군대에 갔고, 함덕주는 수술을 했다. 그래도 LG가 불펜 걱정을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말했듯 고우석은 부진했고, 이정용이야 선발을 뛰다 가끔 알바를 한 것이고, 함덕주는 자주 아팠으니 예상 범위 내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펜에서 맹활약을 했던 선수들은 많았다. 이 정도 누수는 충분히 메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2024시즌 플레이오프 불펜에는 에르난데스와 손주영이 올라와 몸을 풀었다.
정규시즌에서 유영찬은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지만 하필 한국시리즈에서 맞대결 할 확률이 높았던 KIA타이거즈를 상대로 결정적인 블론 세이브를 몇 차례 기록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2023시즌에 이어 2024시즌에도 김진성은 불펜의 기둥 역할을 해줬지만, 기둥이 하나라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건지 그 연차의 베테랑이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사건 이후로는 퍼포먼스 자체도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시즌 내내 이 두 선수를 받쳐줄 선수가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 올라오는 투수를 볼 때마다 이름은 익숙했다. 그런데 그 선수들이 던지는 공은 낯설기 그지 없었다.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아니, 쟤 공 상태가 왜 저래?" 그러다보니 플레이오프에서는 불펜에 에르난데스와 손주영이 올라와야 했고, 강력한 공을 뿌렸지만 결국 무리한 연투로 인해 두 선수 모두 구위저하와 일시적인 부상을 안고 마운드에서 내려가야 했다. 당연히 LG는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3. 공격 부문
2023년 LG트윈스의 타선은 그야말로 '쉬어갈 곳이 없는' 타선이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3점 정도 앞서고 있는 것은 앞서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채은성이 FA를 통해 한화로 빠져나갔지만 그 자리를 메운 오스틴 딘은 역대급 활약을 펼치며 LG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2024시즌으로 들어오며 LG트윈스는 타선에서만큼은 그 어떤 전력손실도 없었다. 라인업을 보면 정말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여기에 시즌 초반 오지환이 빠져있었을 때 구본혁이 등장해서 훌륭하게 자리를 메워줬다. 차명석 단장이 "한국야구의 대명사가 될 것"이라 극찬했던 김범석은 마치 어린 이대호를 보는 것처럼 배트를 돌렸다. LG는 변함없이 강력한 라인업으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변함없다는 것. 이미 강력하다는 게 확인되고, 이미 잘 먹혀든다는 게 확인되면 여기에 변화를 주는 게 결코 쉽지가 않다. 아무 문제 없이 잘 가고 있는데 괜히 무언가를 보태거나 바꿔서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가능성만 높일 필요가 없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야구는 사람이 한다.
한 가지 거대한 과제를 완수하고 나면 누구나 마음의 끈 하나쯤은 풀리게 마련이다. 자신은 느끼지 못해도 준비하는 태도가 느슨해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29년만의 우승 이상의 동기를 부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메기다. 엄밀히 말해 지난 해의 우승이 '남의 일'인 신인이나 비주전 선수가 물을 휘저어 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LG트윈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팬들이 고액연봉자 트리오인 김현수, 오지환, 박해민이나 코칭스태프에 불만을 갖는 건 자연스럽다. 결국 이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선수단에 강력한 동기를 계속 부여해주고 이끌고 나가야 할 리더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액연봉자 선수들의 활약이 떨어졌을 때 바로 다른 선수들을 배치하면서 긴장감을 높였다면 어땠을까?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변화가 도리어 선수단의 분열로 이어져 아예 성적이 급격하게 추락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LG트윈스는 한국시리즈 진출에도 실패했다. 변화를 주지 않는 결과가 이거라면, 결과론적으로는 바꿔보는 게 맞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여기에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LG트윈스 타선은 상당히 완성도가 높지만 너무 왼손에 치우친 구성이다. 김범석이 어느정도 타격에서만이라도 활약을 해줬다면 많이 상쇄가 되었을 텐데, 당장 몸관리에도 실패하며 2군행 통보를 받고 말았다. 점차 리그에 강력한 왼손 외국인 선발이 늘어나는 추세라는 점은 LG로서는 꽤나 불리한 조건이다. 여기에 박동원의 뒤를 받쳐줄만한 백업 포수가 없다는점도 문제다. 김범석의 포지션은 포수로 분류되어 있다. 어째 쓰고 나니 이 문단에서 나온 지적사항은 김범석이 잘하면 다 해결될 문제처럼 보이긴 한다.
4. 주루, 수비 부문
야구는 투수가 공을 던지면서 시작되는 스포츠라서 투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모두가 생각해왔고, 그래서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여겨져왔다. 그런데 점점 야구에서, 특히 패넌트레이스에서 그 해의 '타격'이 가장 강력한 팀이 우승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KBO리그는 단일리그로 한국시리즈 선착 팀이 높은 어드벤티지를 갖고 치르는 포스트시즌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난 이 구조를 무척 좋아하고 지지한다), 결과적으로 최종 우승도 '타격'이 가장 강력한 팀이 가져갈 확률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리뷰를 정리하면서도 실상 이 주루와 수비 부분은 딱히 길게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메이저리그처럼 선수들이 엄청난 수비폭과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아직 수비지표는 제대로 정립조차 안되어 있기에 정확성도 의심해봐야 한다. 심지어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2024시즌 수비에서 가장 많은 에러를 기록한 KIA타이거즈가 통합우승을 해버린 이상 수비가 그리 중요한가 자체가 고민거리다. 개인적으로는 주루든 수비든 '심각'한 수준만 아니라면 평균만 해줘도 타격으로 다 상쇄가 가능한 게 KBO리그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주루와 수비 부분을 언급이라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수비에서의 삼성라이온즈와 주루에서의 LG트윈스를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은 수비로 많은 것을 보완한 팀이라면 LG는 주루에서 정말 많은 것을 잃어버린 팀이다. 이건 분명하다. 경엽볼은 당장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보고 있으면 내가 다 화가 나고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도루 성공률 68.4%라는 건 하는 것 자체가 팀에 마이너스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도루실패만이 문제가 아니다. 주루사도 가장 많이 했다.
이게 선수들의 기본기 문제라고 하면 어떻게든 만회가 될텐데 벤치에서 나오는 무리한 사인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라 도무지 납득이 안된다. 이걸 두고 '적극적인 플레이로 인해 상대방이 압박을 받게 되고 이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는다'고 설명을 하지만, 이걸 듣고 있으면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면 낙수효과로 경제가 좋아진다'는 이미 다 논파당한 미신적인 이론을 듣고 있는 기분이다.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공은 발보다 빠르다. 수비가 상대의 작전을 간파하면 그걸 앞서 틀어막는 건 프로 레벨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도루에 있어서만큼은 나름의 일가를 이룬 이대형 해설위원이 LG 경기에서 수많은 '작두' 해설을 해버리는 건 사실 신기한 일이 아니다. LG트윈스의 주자가 뛴다는 건 어쩌다보니 상수가 되었다. 작전의 제 1원칙은 '상대가 몰라야 한다'가 아닐까? 모르겠다. 2025년 드디어 경엽볼이 '안뛰는 야구'를 추가해서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는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5. 총평
준플레이오프를 힘겹게 치르고 올라왔음에도 나는 LG트윈스가 삼성라이온즈를 플레이오프에서 꺾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만큼 나는 LG트윈스의 뎁스가 외국인 1선발인 코너가 없는 삼성보다는 강하다고 봤다. 하지만 LG는 결국 1승 3패로 플레이오프에서 생각보다 무기력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문성주가 부상으로 수비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고, 박동원이 연일 출장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들, 그리고 LG 불펜에 사람이 없다고 한들 저렇게 무기력할 수 있는 건지 개인적으론 의아할 정도였다.
LG트윈스가 상승과 하강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평가하는 소리가 많이 들리지만 실상 나는 LG가 앞으로도 강팀의 면모를 쉽게 잃어버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리뷰가 끝나면 각 팀 프리뷰를 시작할 예정인데, 며칠 전 그 작업의 초안을 짜보면서 LG트윈스 선수단의 면모를 다시 훑어보니 역시 상당한 뎁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24시즌의 LG트윈스는 야구 팬 모두에게 '그 좋던 LG불펜은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의문을 낳게 만들만큼 신기한 한 해였다. 너무 좋고 단단해서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란 믿음이 도리어 여기저기서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2025년 잠실 야구장 맞은 편에서 자주 보게 될 듯 싶네요
난 그렇게 믿는다. 야구의 가장 큰 장점은 늘 다음이 있다는 거다. 이 타석에서 삼진을 먹어도 다음 타석이 온다. 오늘 경기에서 져도 내일 경기가 이어진다. 혹여 올 시즌 우승을 못해도 다음 해가 찾아온다. 야구는 그렇게 인생을 닮아간다. 다음이 있다. 또 그 다음이 있다. 하지만 다음이 있다는 건 그만큼 냉정하고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오늘의 몫을 다해도 다시 내일의 몫을 해내야 한다. 오늘 30점을 내도 그 30점 중 단 1점도 내일의 경기에 보탤 수가 없다. 보탤 수 있는 건 30점을 내며 내 몸에 쌓인 경험과 실력 뿐이다. 내일이 오면 모든 기록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승리를 위해서는 다시 처음부터 모든 퍼즐을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이 엄중한 현실이 2024시즌의 LG트윈스를 눈물짓게 만들었다면, 2025시즌에는 이 엄중한 현실이 LG트윈스의 희망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제로는 LG트윈스가 몸에 미리 쌓아둔 힘에 비하면 결코 나쁘지 않은 숫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