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의 프레이밍 14
난 지난 글에서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2024시즌 가장 멋있었던 팀은 삼성라이온즈라고 생각한다. 시즌 전 전문가들 중 삼성의 포스트시즌을 점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를 두고 전문가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감히 말하거니와 전체 야구 팬들 중에서 삼성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넘어 한국시리즈 진출을 예상한 사람이 5퍼센트는 됐을까 싶다. 그만큼 삼성라이온즈의 전력에 대한 의구심은 상수와 같은 것이었다. 실제 전력수치만 봐도 그렇다. 미리 말하거니와 올 시즌 삼성라이온즈는 갖춘 전력보다 더 나은 성적을 거둔 시즌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이걸 두고 단순 '플루크'시즌이었다고 말하자는 건 아니다. 야구는 갖춘 전력이 전부가 아니다. 올 시즌 삼성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단점은 최대한 잘 메워내는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난 그게 '팀워크'라고 본다. 야구는 팀스포츠다. 각 포지션에서 1등인 스타플레이어들을 모았다고 해서 팀 순위 1등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팀워크는 아무리 숫자를 들여다본들 보이지 않는다. 점점 숫자들이 더 커보이는 현대야구에서도 이런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이기는 팀이 나온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다.
1. 선발투수진
2024시즌 KBO리그에서 가장 좋은 국내선발투수는 단언코 원태인이었다. 결과적으로 투수 골든글러브는 NC의 하트가 가져갔지만, 난 원태인이 가져갔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원태인은 삼성라이온즈 선발진의 중심에 서서 돌격대장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냈다. 2024시즌 최고의 선발진이었다고 평가받아야 할 삼성라이온즈 선발진에서 중심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낸 국내투수라면 보이는 수치가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그 가치가 모자라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약간 곁다리로 빠지자면 골든글러브 처럼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에서는 팀 성적이 고려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일견 공정해보이지만 실제로 그게 공정한 게 맞나 싶다. 팀 성적을 고려하지 않으면 '덜 시끄러워진다'는 건 맞다. 숫자만 보면 되니까 간명하다. 하지만 난 그건 제대로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MVP나 신인왕, 골든글러브 투표결과를 보면 "이 선수에게 표를 줬네?" 싶은 경우가 분명 존재한다. 받은 선수도 민망할 게 뻔한데 한 표, 두 표, 세 표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투표방식으로 상을 준다는 것 자체는 '숫자 이상의 무언가도 고려해보자'는 뜻이라고 난 생각한다. 숫자로만 상을 줄 거라면 가중치를 도입해서 계산기를 두드린 다음에 수상자를 결정하는 게 맞을 거다. 애초부터 골든글러브만 해도 투표기준 안에 심지어 '인기도'가 들어가기도 한다. 난 이걸 '팀 기여도'로 바꾸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수상자 선발 방식을 바꾸기 전까지는 무형의 가치도 고려해보자라는 취지만큼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본다.
KBO리그에서 선발진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강력한 외국인 원투펀치가 있는가? 3선발로 경쟁력이 있는 국내에이스가 존재하는가? 그 다음 4선발 던질 투수만 어느정도 갖춰져도 KBO리그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발진이다. 이런 기준에서는 곽빈이 있는 두산, 고영표와 엄상백이 있는 KT, 류현진이 돌아왔고 신인왕 문동주가 버티는 한화 정도가 가장 좋은 선발진을 구상하리라고 예상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들 팀 모두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 문제가 터지며 선발진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다.
초반기에는 불안불안했지만 점점 리그에 적응해가며 에이스로 변모해간 코너, 피홈런 문제가 터지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라이온즈파크라는 좁은 구장에서도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둔 레예스의 외국인 원투펀치에다가, 국내 1선발인 원태인을 갖춘 삼성의 선발야구는 예상보다 더 탄탄한 모습을 보여줬다. 여기에 4선발로서는 쏠쏠한 활약을 해준 좌완 이승현까지 있었기 때문에 삼성은 언제나 경기 초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5선발로 얼굴을 간간히 보였던 황동재나 이호성까지 제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사실 KBO리그에서 그건 너무 큰 욕심이다.
2. 구원투수진
2024 시즌을 앞두고 삼성라이온즈 프런트는 김재윤과 임창민 등을 보강하면서 불펜의 헐거움을 메우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수치로 보면 이는 어느정도는 성공을 했다고 평가를 받아야 한다. 삼성라이온즈의 뒷문이 마냥 헐거웠다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하지만 전반기 막판에 들어서며 마무리였던 오승환의 난조가 시작되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등장곡이 흐르며 오승환이 등판하면 야구를 꺼버렸던 KIA팬인 나로서는 오승환의 난조를 보고 있자니 괜히 서글퍼지기도 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구나' 라는 엄연한 진실을 굳이 내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나 옛날이면 오승환의 돌직구에 KIA타자들이 헛스윙만 줄창 해대다가 경기가 끝나곤 했는데 이제는 KIA타자들의 배트에 오승환의 공이 날아가는 걸 보고 있으니 우리 팀이 이겨서 좋은 것 반, 왠지 서글퍼지는 것 반 해서 참 묘한 기분으로 경기를 지켜보곤 했다.
삼성라이온즈 불펜진 자체가 나쁜 성적을 거뒀다고 할 수는 없다. 어느정도 몫은 해줬다. 하지만 '임김오(+송)'로 불리는, 연차가 오래 된 베테랑이 주축이다보니 구위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현대 야구 불펜 투수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2024시즌 구원투수진이 좋았던 두 팀은 두산과 KIA였는데, 이 두 팀은 마무리인 김택연과 정해영부터가 구위형이고 뒤를 받치는 선수들이 구위형과 완급조절형으로 잘 분배되어있다.
예전같으면 당연히 구위형으로 분류되었을 오승환이나 김재윤 모두 이제는 완급조절로 먹고 사는 선수들이다보니 상대 타선의 강약에 따라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괴력 있는 타자가 많은 KIA나 SSG 같은 팀을 만나면 초반에는 앞서다가 후반 불펜 싸움에서 뒤집히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는데, 이는 모두 상대를 찍어누르는 구위형이 없는 까닭이었다. 그나마 최지광, 김윤수 등이 희망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최지광은 부상으로, 김윤수는 제구난조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3. 공격 부문
말이 많지만 난 라이온즈파크 같은 구장 디자인을 좋아한다. 잠실야구장도 좋아한다. 야구장의 개성이 강렬할수록 같은 리그 안에서도 다른 느낌의 야구가 펼쳐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성라이온즈는 2024시즌에 와서 드디어 본인들의 홈 구장에 적응하는 모습이었다. 리그 1위의 홈런을 앞세워서 상대를 갑작스러운 그로기 상태로 몰아놓고 경기 주도권을 잡아온 다음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질식시키는 야구를 보여줬다. 종합격투기로 따지면 그라운드 기술이 훌륭한데, 상대를 넘어뜨리는 기술 하나만큼은 꽤 열심히 갈고 닦은 격투가를 보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따지면 입식격투 기술은 떨어졌다. 야구의 유행어 중에 '안타는 쓰레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안타는 결코 쓰레기가 아니다. 삼성라이온즈처럼 홈런에 의존하다보면 풀리는 날과 안풀리는 날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야구를 할 수 밖에 없다. 파워에서는 약간 뒤떨어질지 몰라도 LG트윈스나 롯데자이언츠의 공격력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공격에서 어느 정도의 평균치를 꾸준히 뽑아내기 때문이다. 그나마 꼬여들어가는 야구를 풀어낼 수 있는 선수가 구자욱, 김지찬 정도인데 포스트시즌 들어와서 이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리게 되어버리자 삼성의 공격루트는 오직 홈런말고는 없었다.
이재현과 김영웅 같은 뉴페이스들이 등장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전반적으로 에버리지가 떨어지는 타선이라는 점은 양날의 검처럼 보인다. 홈런 1위인데 득점은 6위, 생산성은 7위라는 점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아마도 2025시즌을 두고 삼성에 대한 평가는 아직 어지럽게 엇갈릴텐데 그 가장 큰 원인은 공격 부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따른 결과일 거라 보인다. 만약 이재현과 김영웅이 구자욱과 비슷한 루트로 성장하기 시작한다면 삼성은 그 옛날 이마양트리오 부럽지 않은 화력을 갖추게 되겠지만 반대로 이 선수들이 헤매기 시작한다면 삼성은 계속 '구자욱과 아이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 주루, 수비 부문
올 시즌 삼성라이온즈의 키워드는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선발투수, 홈런, 그리고 수비다. 여기에 주루플레이도 생각보다 단단하게 펼쳐왔음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싫어할 수 없는 야구를 보여준 게 2024시즌 삼성라이온즈였다. 상대를 압도하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결코 제풀에 지쳐 쓰러지거나 자기 운동화 끈을 밟고 넘어지는 일은 없는 팀이었다.
타격생산성에 비해 아쉬운 내야수비를 보이다 외야로 포지션을 변경한 김지찬의 안착도 성공적이었다. 조만간 이재현은 김주원과 국가대표 유격수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강민호는 연차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안방을 여전히 안정적인 모습으로 이끌어줬고, 류지혁이나 김헌곤 같은 허리라인의 중고참들도 쏠쏠한 활약을 펼쳐줬다.
KBO리그가 재미있는 이유는 수비가 약하기 때문이다. 수비가 약하다보니 변수가 말도 안되게 늘어난다. 끝나야 될 이닝이 끝나지 않고, 투수가 쓸데없이 소모되고 이는 다시 타격의 득세로 이어진다. 악순환인데 가끔 보기에는 재미있다. 문제는 자주 보면 건강에 해롭다는 거다. KBO리그가 더 나은 수준의 리그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비력 강화가 절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비는 연습으로 실력을 늘릴 수 있는 분야다. 5강에 도전하고자 하는 팀들은 삼성라이온즈의 수비를 꼭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5. 총평
앞서 난 2024시즌 삼성라이온즈의 키워드를 셋으로 정리했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부상'이란 키워드가 있다. 어느 팀이든 잔부상은 이어지게 마련인데, 삼성라이온즈는 올 시즌 부상관리에 있어서 만큼은 아쉬운 모습을 노출했다. 부상관리만 제대로 됐더라도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프런트의 '고민'이 아닌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만약 비슷한 모습이 반복된다면 그 무엇보다 삼성라이온즈의 끈끈한 팀워크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빠르게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너, 구자욱, 김지찬, 이재현... 타팀팬인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많은 주전급이 부상으로 인해 한국시리즈에 모습을 보이지 못했거나, 모습을 보였더라도 제 기량을 펼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응원하는 KIA도 부상 관련해서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 하도 많은 선수들이 다치는 걸 보아온 결과 부상관련해서는 투명성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외부로 다 알리라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팀 내 소통과정에서 투명성이 사라지면 사소한 부상마저 누적이 되고 말그대로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막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만큼은 피하라는 뜻이다.
2024시즌 삼성라이온즈는 그 어느 팀보다도 야구를 '야구답게' 하는 팀이었다. 남들은 '특별히 잘난 게 없지 않나?'하는 의심 섞인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들은 온 몸에 단단한 기본기를 갖춘 모습으로 당당하게 돌아왔다. 단단한 기본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2024시즌의 준우승은 분명 아쉬움이 남는 결과였지만, 기본기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젊은 사자들은 하나 남아있는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도전의 결과물을 움켜쥐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https://youtu.be/pfSHVVHlKi8?si=uQ_rF0TVAkHkp5F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