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의 프레이밍 24
어느새 KBO의 개막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이 시점이 야구팬으로서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선발 야수 라인업을 짜보고, 선발 투수진의 로테이션을 구상해보고, 불펜 투수진의 뎁스를 점검하고, 유망주들의 성장을 기대하면서 계산해보면 우리 팀이 우승을 못할 이유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마치 로또복권을 들고 1등 당첨이 되면 무엇을 할까 고민해 보는 것과 비슷하다. 잠깐이나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든다. 물론 그 기분은 낙첨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고 무참히 무너지지만, 다시 달려가 로또를 사서 지갑 깊숙히 꽂아두기만 하면 손쉽게 되살아난다.
기형도 시인의 '조치원'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번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기형도 시 '조치원' 중에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수록」
사내는 열차를 타고 고향인 조치원으로 돌아가고 있다. 서울살이 중 상처를 입은 한 사내에게는 고향인 조치원이 겨울의 외투이고, 젊은 연인에게는 애인이, 종교인에게는 신이, 서민에게는 로또가 겨울의 외투가 되어준다. 야구팬에게는 이 스토브리그라는 시절이 그렇다. 이 시절만큼은 모두가 희망찬 시선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본다. 이 포근한 시절에 '이 팀은 이게 문제고, 저 팀은 이게 어렵고' 라고 떠들어대는 건 참 잔인한 짓이다. 겨울인데 외투를 빼앗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분명한 한가지 사실 때문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맞출 가능성보다 못 맞출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니 모든 것이 조금은 너그러워진다. "맘대로 떠들어라, 우리 팀은 우리 팀의 갈 길을 간다."라고 넘길 수 있다. 2024시즌의 삼성라이온즈가 그랬다. 그들은 새 시즌에도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러니 부디 너그럽게 이 글을 읽어주시라.
리뷰와 프리뷰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난 선발투수를 평가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이닝 소화 능력'을 본다. 그러다보니 투수 골든글러브를 NC다이노스의 하트가 차지했지만, 난 그 선수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선수는 바로 키움히어로즈의 아리엘 후라도다.
키움히어로즈가 두 명의 외국인 투수를 보류권도 묶지 않은 채 풀어버렸을 때 가장 탐이 났던 선수 또한 아리엘 후라도였다. 삼성라이온즈는 견갑골 부상으로 포스트시즌에 출전하지 못한 팀 에이스 코너 시볼드와 작별했지만, 검증된 투수인 아리엘 후라도를 발빠르게 영입함으로서 외국인 투수 부분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2023시즌 LG트윈스는 우승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키움히어로즈의 국내 선발 에이스 최원태를 트레이드를 통해 과감하게 영입했다. 하지만 최원태는 우승 청부사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기대에 못미치는 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FA시장에서 그가 미아가 되거나 저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1997년생이다. 보통 투수로서는 이제 전성기에 접어드는 나이다. 이미 이룬 성적도 나쁘지 않다. 3선발은 무리라고 해도 4선발로서는 넘치는 선수다.
LG트윈스 입장에서 최원태를 놓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이전의 트레이드가 실패였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LG트윈스가 실질적으로 최원태를 놓아버렸다. 삼성라이온즈가 거의 단독입찰하듯 뛰어들어 4년 총액 70억원(계약금 24억원, 연봉 34억원, 인센티브 12억원)의 조건으로 최원태를 영입했다.
2024시즌 최상급 외국인 투수로 꼽힐 수 있는 후라도의 영입은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할까?
후라도가 고척돔을 떠나서 타자 친화구장인 라이온즈파크를 홈으로 쓴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예측 결과가 엇갈릴 수 있다. 기본적으로 후라도는 땅볼형 투수다. GO/AO(땅볼/뜬공 비율지표)가 1.27로 땅볼 비중이 높다. 삼성라이온즈는 내야 수비가 강력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충분히 긍정적인 시너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고척돔에서 15경기를 뛰는 동안 피홈런이 6개였던 선수가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는 3경기에 홈런 4개를 내줬다. 이제 삼성라이온즈의 장타자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지만, 아무리 땅볼형이라고 해도 라이온즈파크를 홈구장으로 사용한다는 건 부담이 될 게 분명해보인다.
나는 두산베어스 프리뷰에서 '새로 들어온 외국인 투수가 평균치만 해줘도 무조건 전력이 상승되었다고 봐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2025시즌 두산베어스 외국인 투수들에게 10점 만점에 5점 밖에 주지 못한다 해도, 0점에서 출발하는 거라면 '플러스 5점'이 된 셈이다.
같은 의미에서 후라도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코너의 활약을 밑바탕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 코너는 '아픈' 투수였지 '안좋은' 투수가 아니었다. 만약 코너가 부상을 당하지 않고 포스트시즌을 정상적으로 소화했다고 가정해보자. 교체할 이유가 있었을까? 코너와 레예스 둘 다 건재한 상태에서 굳이 후라도를 영입하고 싶었다면 높은 확률로 례예스를 바꿨을 것이다.
코너와 후라도를 일대 일로 비교하면 당연히 후라도가 더 좋은 선수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전력상승이 이뤄졌다고 볼 수는 없다. 업그레이드이긴 하지만 약간 옆그레이드 측면이 더 강한 느낌의 업그레이드가 아닐까 싶다. (이미 외국인 선수가 좋았던 팀들은 전력상승이 이뤄질 공간이 부족하다는 게 이런 뜻이다.)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삼성라이온즈의 행보는 좋게 말하면 적극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전략부재였다고 할 수 있다. LG트윈스가 실질적으로 최원태를 놓아버린 듯 했던 상황에서 보장금액만 58억으로 최원태를 영입한 것 또한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2024시즌 NC다이노스가 갑자기 카스타노를 방출하고 요키시를 영입했을 때, 난 개인적으로 NC다이노스가 아무리 외국인 선수 영입에 노하우가 있는 팀이라 해도 꽤나 위험한 판단을 했다고 봤고, 결과적으로 위험은 현실이 됐다. 그리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두산베어스가 요키시와 시라카와를 저울질 하다 시라카와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타 팀 프런트와 코칭스태프도 전문가들이다. 그들의 시선을 마냥 무시하다가는 탈이 날 때가 온다. 비슷한 의미로 나는 최원태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LG트윈스가 너무 '적극적으로' 안 잡았다는 데는 뭔가 있다는 거 아닐까? 심지어 LG트윈스는 유강남을 놓아버리고 박동원을 잡아옴으로서 성공을 한 사례마저 있다. 여기에 최원태는 아주 약간이나마 뜬공이 더 많은 투수 유형이다.
삼성라이온즈 프런트는 거의 대부분의 FA 투수에게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행보가 스스로의 협상력만 낮추는 건 아니었을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이래놓고 정작 불펜보강에는 실패했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김재윤을 마무리로 못박고 시즌을 출발하는 건 김재윤의 컨디션 관리에는 도움이 되는 일이겠으나, 그보다 갑작스러운 김무신의 부상 이탈이 너무 뼈아프다.
난 개인적으로 삼성라이온즈의 2025시즌 키플레이어로 김무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구력 측면에서는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플레이오프에서 LG트윈스의 오스틴 딘을 표적등판으로 침몰시킬 때처럼 강력한 구위로 상대방을 윽박지르는 불펜투수는 언제나 꼭 필요하다. 김무신이 이탈을 해버리고나니 최원태의 활약이 더더욱 중요해져버렸다. 좌완 이승현이나 황동재, 백정현 등 아직 5선발진의 활약 여부를 담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만약 최원태가 부진하면 삼성라이온즈 투수파트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LG트윈스 프리뷰를 작성할 때 투수 파트에서 '엘리에이저 에르난데스' 선수 이야기만 한참 했다. 바꿨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싶었다. 비슷하게 삼성라이온즈에서는 디아즈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2024 한국시리즈 5차전에 나선 양현종이 2025시즌 삼성라이온즈에게 독을 뿌린 거 아닐까?
"이 외국인 선수는 교체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이야기를 KT위즈의 쿠에바스, LG트윈스의 에르난데스, 삼성라이온즈의 디아즈에게 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디아즈가 가장 위험한 선수로 보인다. 물론 장타는 매력적이지만, 과연 삼성라이온즈가 장타에 갈증을 느끼는 팀인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성라이온즈 타선의 가장 큰 약점은 낮은 에버리지에 있다. 팀 공격을 풀어주는 선수가 구자욱과 김지찬, 강민호에 한정된다. 이 선수들이 풀리는 날과 안 풀리는 날의 차이가 극명하다. 장타는 약간 떨어진다고 해도 SSG랜더스의 에레디아나 롯데자이언츠의 레이예스 같은 선수가 2번 타순에 자리잡았다고 가정해보자. 김지찬-외국인타자-구자욱으로 상위타선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뒷 타순의 장타자들에게도 힘을 줄 수가 있다.
삼성라이온즈같은 타선이 지는 날을 보면 삼성라이온즈는 홈런 세 방을 쳤는데도 3점을 얻었을 뿐인데 상대는 홈런 한 방에 4점을 내는 그림일 때가 있다. 홈런이 많이 나왔다는 건 다득점이어야 한다는 뜻인데,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맞은 홈런 갯수에 비해 삼성라이온즈가 멀리 도망가있지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삼성라이온즈의 약한 불펜투수진이 기름을 살짝 부어주면 일이 심각해진다. 매번 지는 패턴이 비슷해진다.
그렇다고 김영웅이나 이재현 같은 선수에게 갑자기 에버리지를 높이는 타격을 주문하는 것은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 선수들의 에버리지는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이 두 선수에게 더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도 팀 타격 전체에 활로를 뚫어줄 수 있는 외국인타자를 뽑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디아즈는 그런 스타일의 외국인타자로 보기는 힘들고, 심지어 2024시즌 패넌트레이스 막판에는 약점이 읽혀서 고전을 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바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4시즌 삼성라이온즈가 얻은 해답이 '장타'인 것은 맞지만,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늘의 정답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나의 정답을 알지만, 나의 상대가 나의 정답을 점점 오답으로 바꿔갈 것이기 때문이다. 야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언제나 상대가 있다.
이미 투수 파트를 다루면서 말했듯이 최원태가 키플레이어가 되어버렸다. 삼성라이온즈의 불펜진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실상 선수 숫자 측면에서는 크게 부족하지 않다. 문제는 구위형 불펜투수가 부족하다는 거다. 구위형으로 가장 주목받는 삼성라이온즈 불펜투수가 김무신이었는데 그 선수가 갑자기 이탈을 해버리는 바람에 당장 최지광 말고는 떠오르는 구위형 믿을맨이 없는데 심지어 최지광마저도 수술후 복귀하는 시즌이라는 점이 불안요소다. 이러다보면 전천후로 신인인 배찬승이 뛰어다녀야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된 이상 선발투수진에서 최대한 이닝을 지워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게 가능하려면 최원태가 '돈 값'을 다해줘야 한다. 최원태가 헤맨다고 가정하면, 원태인이 버티는 3선발까지는 문제가 없겠지만 나머지 4-5선발 출전경기는 불펜진이 모든 부담을 떠안아야 할테고, 내구성이 약할 수 밖에 없는 삼성라이온즈의 노쇠화된 불펜 필승조를 생각하면 뒤에서부터 도미노가 한 칸 한 칸 무너져 앞을 덮치는 그림이 떠오른다.
사실 3위를 두고 두산베어스와 격차가 거의 없는 상태 아닐까 했는데 김무신의 이탈이 더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성적만 두고 보면 김무신이 뛰어난 선수냐 물으면 그렇진 않다라고 말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삼성라이온즈 불펜진에서 가장 무서웠던 선수가 김무신이었던만큼 더더욱 아쉽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반대로 김무신이 없다 한들 삼성라이온즈가 4위 아래로 내려갈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기초가 단단하게 만들어진 팀이다. 2024시즌 한 해 반짝하고 다시 가라앉을 팀은 아니다.
삼성라이온즈의 2024시즌은 멋진 뒤집기 한판이었다.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들은 최후의 자리까지 올라가 멋진 경기를 보여줌으로서 또 하나의 주인공이 되어 정상에서 내려왔다.
그런 팀에게 다시 2위가 아닌 4위라는 예상 성적표를 내미는 건 또 다시 '증명'을 요구하는 일 같아서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한 짓인데 내가 왜 야속하게 느끼는지 모를 일이다. 그게 야구고 그게 인생인 건가 싶을 따름이다.
인생은 끝도 없이 증명을 요구한다. 정말 그렇다. 오늘의 정답은 오늘의 정답일 뿐 결코 100퍼센트 내일의 정답일 수는 없다. 뚝심과 미련함은 한 끗 차이고 간사함과 지혜로움도 종이 한 장 차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 솔직히 너무나 어렵다.
그저 난 나의 이 박한 예상을 삼성라이온즈가 다시 한 번 뒤집어주길 바랄 뿐이다. 멋진 업어치기 한 판을 다시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영화 라이온킹에서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바위 위에 올라가 심바가 울부짖는 것처럼, 그대들이 다시 한 번 스스로의 가치를 멋지게 증명해 내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