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리 님께 보내는 일곱 번째 교환일기
1. 일부러 한 달이라는 텀을 두진 않았는데 어느새 한 달이 흘러 버렸어요. 그 사이 시간이 압축되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건가 싶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보니 여기네요. 이쯤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요렇게 또 일 년이 흘러갈지도 몰라.' 맞아요. 오늘 퇴근하고 일부러 천변길을 따라 걸어왔는데 걷다보니 입고 있는 점퍼가 꽤나 부담스럽더라고요. 나무엔 아직 이파리가 돋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지만, 엊그제 이 길에도 눈이 흩날렸겠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보면 주변이 푸릇푸릇해졌다가 또 못견디게 더운 여름이 왔다가 다시 낙엽이 지고 눈이 흩날리겠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벌써부터 이럴 필요는 없는데 일년 다 보낸 기분으로 길을 걸었어요.
2, 낯선 단어가 하나 들어갔죠? '퇴근'. 맞아요. 아이들의 개학 시기와 더불어 다시 출근을 시작하다보니 개학한 기분이에요. 개인적인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는데 지난 사무실에서 같이 근무했던 분이 개업을 하신 곳이라 조건을 맞춰주셨죠. 무려무려 자율출퇴근이랍니다. 제 몸뚱아리가 종종 고장이 나서 매일마다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 어렵다는 게 주된 이유였어요. 이러다보니 스스로 정해놓은 업무 분량을 사흘이 지나도록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하는 놀라운 결과를 맞이하고는 있습니다만 어쩔 수 있나요. 내일의 헤비가 고생을 하리라 생각을 할 밖에요.
3. 출근을 했으니 마음이 심해에서 올라왔는가, 모르겠어요. 친절한 사람들과 반복적인 일상, 익숙한 작업들이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긴 해요. 일 년만에 타는 자전거 같아요. 처음에는 낯설고 당장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싶지만 어느새 마음 속의 톱니바퀴들이 돌아가며 주어진 일만큼은 능숙하게 처리하더라고요.
그래도 마음 속에서는 계속 멀미가 납니다. 멀미는 시각정보와 몸의 균형감각이 불균형을 일으킬 때 이걸 위험신호로 느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데, 오늘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켠이 계속 다른 세상을 기웃거리고 있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4. 요즘 위로가 되어준 영상이 하나 있어요. 마침 '미키 17'을 개봉해서 알고리즘이 끌어올려 놓은 것이겠죠. 봉준호 감독이 세계적 거장들이 느끼는 불안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에요.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https://youtu.be/DWYXS3sA1Lk?si=ZVQU7tq3tIf8DNHY&t=38
"큐브릭이 스필버그에게 물어봤대요. 너는 영화 찍을 때 어떨 때가 제일 싫으냐? 그랬더니 스필버그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랬다잖아요. 차에서 내릴 때."
물론 그런 생각도 들어요. 언제까지 징징거릴래? 니가 명작 쓰냐? 너 고작 남들은 하루에서 스무 장 서른 장 써제끼는 판타지, 무협을 한 땀 한 땀 이탈리아 장인마냥 겨우겨우 꿰매가며 쓰는 주제에 왜 이리 유세를 떨어? 니가 뭔데 거장들의 일화에서 위로를 받아? 결과가 그럴싸 해야지 폼만 그럴싸하면 뭐에 쓰냐고. 그냥 대가리 처박고 베끼든 챗GPT에게 물어보든 해서라도 분량이나 채우라고.
왜 마음의 소리는 늘 옳은 소리만 할까요? 거장의 공포와 집착은 거장만 느끼는 게 맞는데 저는 공포와 집착은 거장처럼 느끼면서도 정작 아무 것도 쓰진 못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들도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만큼은 나름의 위안이 돼요.
출근을 하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에 한 시간 씩만 어떻게든 작업을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이 글을 쓰고 나면 오늘로 작심 삼일의 사흘차를 채우러 갈 거예요.
5. 심해는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인데 여기서 혜리 님의 글들을 볼 때마다 희미한 빛의 기운을 느끼고 있어요. 그 사실은 도리어 제겐 두려움을 주기도 해요. '진짜 심해는 여기보다 더 깊을 거야, 더 캄캄할 거야, 그 어떤 빛의 느낌마저도 내려오지 않을 거야', 그렇게요. "곧 같이 산소 마시러 올라가자"는 혜리 님의 말이 깊은 위로가 되었지만, 거기에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사실 이런 것 밖에 없어요.
혹시라도 혜리님이 심해에 내려오시게 된다면 그보다 조금 더 캄캄한 곳에 제가 있을 게요.
내려 앉는 걸음 걸음 놓인 헤비를 사뿐히 즈려 밟고 올라가시옵소서.
심해식 위로죠. 뭔가 심해어처럼 억눌리고 뒤틀려 있어서 이게 위로 맞나 싶어져요. 기껏 내밀었는데 가위손이거나 사방이 뾰족뾰족해서 잡을 곳이 없는 화살 모양 촉수 같은 기분이랄까요.
6. 심해 얘길 계속 하다보니 진짜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는데 혜리 님은 혹시 아쿠아리움 좋아하세요? 사실 전 아쿠아리움을 한 번 밖에 가보질 않아서 좋아한다고 말을 할 수는 없는데, 싫진 않았거든요. 대신 그 안에 벨루가는 조금 불쌍했어요. 상어니 커다란 가오리는 그다지 불쌍하지 않아했으면서 벨루가는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안타깝고 동시에 귀엽고.
혹시라도 나중에 이 심해를 떠나 드디어 육지에서 호흡을 하게 될 날이 오면 같이 아쿠아리움에 가실래요? 물론 혜리님도 아쿠아리움이 싫지 않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죠. 또한 육지로 올라왔을 시점에는 제가 스스로의 의지로 거동이 가능하다는 것도 전제로 해야겠네요. 지팡이 사용까지는 봐준다면 다행이고요.
7. 다시 한 번 읽어봤는데 역시나 심해에 오래 살다보니 심해사투리가 심해져서 큰일이네요. 모든 말들에 BLUE가 묻어나요. 블루가 제자리를 잘 찾아가면 블루 노트가 될 수 있을 텐데, 과연 그럴 날이 오려나요.
블루스나 재즈는 아무래도 깊은 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단골로 삼았을 법한 어둑어둑한 바에 앉아서, 느릿느릿 돌아가는 LP판으로, 언더락된 위스키 한 잔을 옆에 끼고 들으면 좋지요.
저는 평소엔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왜 이리 의사 선생이 술을 끊으라 하면 술 생각이 나는 걸까요? 뭐든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데, 혹시 누군가가 저보고 심해로 들어가라 하면 그제야 심해를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려나요? 정말 모를 일이네요.
그렇다고 혜리 님이 제게 '심해로 들어가요'라고 말하진 마세요. 악역은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그 뿐이고, 혜리 님이 심해로 가라 하시면 진짜 마법주문에 걸린 것처럼 바다가 깊고 깊은 곳으로 저를 영영 끌고 들어갈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