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의 프레이밍 28
이 야구 글을 쓰게 된 건 팔할이 친구의 권유였는데 ("맨날 그렇게 말로만 떠들어대지 말고 글로 써보라고!"), 얼마전 그 친구를 만나 밥을 먹으며 패넌트레이스가 시작되기 전까지 시범경기 기간 동안은 그다지 쓸 게 없다 했더니 녀석은 이렇게 답했다.
"자극적으로 쓰라고, 자극적으로."
인생 자체가 자극과는 거리가 먼 인간인 나로서는 좀 버거운 주문이었는데, 고민한 결과 나온 아이템이 바로 이 것이다.
올 시즌이 끝나고 교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감독은 누구인가?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 감독교체를 주제로 삼다니, 이것보다 자극적인 내용이 어디 있겠는가?
"쓸게 없다보니 별 걸 다 떠드는구나." 하고 가볍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다시 말하거니와 악플은 유료로 부탁드린다.
대한민국에서 단 10자리 밖에 없다고 하는 프로야구 감독 자리는 야구인이라면 누구나 꿈꿀법 한 자리이지만 동시에 연봉의 절반 이상을 '욕값'으로 치른다고 할 정도로 힘든 자리다. 팀 성적이 조금만 가라앉아도 수많은 야구팬들이 감독의 성을 '돌'로 바꿔 부르고, 온갖 희한한 욕들이 감독을 향해 쏟아진다.
그러다보니 프로야구 감독은 언제 어떤 이유로 잘려도 이상하지가 않다. 계약기간이 남아있다는 건 결코 안심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역대로 봐도 그렇다. 준우승을 해도 잘리고, 임기 중 우승을 했던 감독이어도 잘린다.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보니 단기전에 약하다고 잘리고, 잘 나가다가도 연패가 길어진다는 이유로도 잘린다.
한 때 유행했던 개복치 밈 같다. 지루해도 죽고, 하품하다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서 죽고, 누가 째려봐서 가슴이 아프다는 이유로 죽는다. 이 쯤 되면 죽으려고 태어났나 싶을 정도다. 마찬가지다. 잘리려고 있는 자리가 프로야구 감독 같다.
그러니 여기서 안심이라고 해도 실상 안심할 수 있는 감독은 아무도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프로야구 감독이 파리목숨이래도 올 시즌 새로 팀을 맡은 감독이 잘리려면 스포츠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나올 무언가 범법행위를 저질러야 한다. 솔직히 NC다이노스의 성적이 만족스러울만큼 나올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렇게 '기대'가 없다는 건 동시에 '감독 탓'하기도 어렵다는 뜻이 된다. NC다이노스 프리뷰에서도 적었지만 이 팀은 야수 출신인 감독보다는 투수 출신인 수석코치의 역할이 훨씬 중요한 상태다. 즉, 올 시즌이 끝나고 잘린다거나 보직이 바뀐다 해도 감독보다는 수석코치의 목이 달아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범호 감독은 2년 계약으로 출발했다가 부임 첫 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바로 최고대우로 재계약에 성공했다. 문제는 KIA타이거즈의 우승 징크스다. 2009년에도, 2017년에도 우승 후 성적이 급전직하하며 팬들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 감독교체도 자연스레 뒤따라왔다. 현재 KIA타이거즈의 팀 구성이 워낙 좋다보니 반대로 팀 성적이 안나오면 모든 화살을 감독이 맞아야 하는 구조라는 건 부담이다.
2024시즌 김태형 감독을 보면 왜 그가 명장이라 불리는지도 느껴지고, 그의 야구가 어떤 그늘이 있는지 또한 느껴졌다. 야수진을 이렇게 빨리 재구축할 수 있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고, 불펜투수진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는 건지도 신기할 정도였다. 장점만 보면 잘릴 거란 생각이 들지 않고, 단점만 보면 당장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김태형 감독과는 정반대다. 이강철 감독은 투수 조련과 운영의 장인이 맞다. 불펜투수를 너무 갈아넣는다는 비판을 받지만 동시에 갈아넣을 법한 불펜투수들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이강철 감독이다. 이강철 감독의 최대 약점은 야수 발굴이다. 너무 쓰던 야수들만 쓰다보니 야수진 중 젊은 선수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이름값은 그럴싸 한데 이 선수들이 드러누워버리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화이글스는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엄청난 물량공세를 펼쳤다. 여기에 신구장을 지어올리기까지 했다. 팬들의 눈높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데 문제는 아직까지도 팀 전력이 완벽하게 갖춰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거다. 야수진, 특히 외야진 양 코너는 제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여전히 결정되지 못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구단이 투자를 이만큼 했는데도 성적이 안나오는 게 말이 되냐?"는 이야기가 나오면 팀 입장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의외로 많지 않다.
아마도 올 시즌 최하위는 키움히어로즈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홍원기 감독은 2023시즌을 앞두고 맺은 3년 계약 내내 최하위를 하게 되는 셈이다. 사실 3년 연속이 아니라 2년 연속 꼴지만 해도 그 감독은 잘리는 게 당연한데 홍원기 감독만큼은 의외로 안정적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 잘릴 거라는 얘기도 많지 않다.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키움히어로즈의 최하위가 과연 감독 탓인가? 그러나 성적부진이 꼭 감독 탓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 팀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면 그게 감독이 되는 경우는 무척 흔하다.
2024시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예상하지 못했지만 박진만 감독은 삼성라이온즈를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쯤되면 충분히 재계약을 할 법 하지 않나 생각이 드는데, 아직까지 재계약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이대로 계약 마지막해에 돌입하게 된다면 구단의 뜻은 분명해진다. 올 시즌의 성적을 보겠다는 거다. 자, 작년에 2위를 한 팀이 올 시즌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몇 위를 해야 할까?
염경엽 감독은 2023시즌 LG트윈스의 숙원을 풀어준 감독이지만 2024년에는 왕조선언을 해놓고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감독이기도 하다. 평가도 극과 극으로 갈린다. LG트윈스 선수들에게 적극성을 불어넣었다고도 하고, 무리한 베이스러닝을 주문해서 공격의 흐름을 스스로 끊어먹는다고도 한다. 만약 염경엽 감독이 올 시즌 우승에 실패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면 역시 '기왕 우승을 할 거라면 계약 마지막해에 할 것.'이라는 야구판의 속설이 다시 한 번 증명될 것이다.
푸른 피의 라이온킹 이승엽이 두산베어스 유니폼을 입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두산베어스의 유튜브 채널은 온통 이승엽 감독 소식으로 도배가 되었다. 누가보면 이승엽이 베어스 레전드인줄 알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쇼킹함은 온데간데 없이 이미 이승엽 감독은 지난 2024시즌 와일드카드전 패배 직후 팬들의 '이승엽 나가!' 떼창을 들어야 했다. 구단 수뇌부에서도 적당한 성적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인이 공개적으로 나와있는 상태다. 이승엽이 계속 두산베어스 감독석에 앉아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국시리즈는 진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지 개인적으로 KT위즈 타격코치나 단장 시절 이숭용은 그렇게 구설수가 많은 인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SSG랜더스 감독 자리에 와서는 호를 '구설'이라 붙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만 열면 사고를 쳤다. '말하기'가 어려운 건 내 입을 떠난 후 해석은 타인의 머릿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에 있다. 심지어 텍스트는 더 어렵다. 마주 앉은 채로 표정과 뉘앙스를 다 들었을 땐 문제가 없는데 같은 말을 텍스트로 옮기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자주 벌어진다. 이 사실을 모르는 캐릭터들이 늘 구설수를 몰고 다니는데 이숭용 감독이 그 과 아닌가 싶다. 이숭용 감독이 갑자기 선임됐을 때 구단 최상층의 뜻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썰이 돌았는데, 현재 SSG랜더스는 KBO에서 유일하게 구단주 보좌 역을 두고 있는 팀이다. 어째 감독의 목덜미를 노리고 이미 칼날이 움직이고 있는 그림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런 글을 써놓고 조금 이율배반적인 마무리를 하자면, 그래도 올 시즌만큼은 '중도퇴진' '자진사퇴' 같은 단어가 보이지 않은 채로 한 시즌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계약 기간을 무조건 지키자는 건 아니지만 되도록이면 야구 감독들이 부임할 때처럼 물러나는 것도 조금은 깔끔하고 멋지게, '아름다운 뒷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야구가 이기고 지는 게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진짜 죽고 사는 문제는 제대로 풀지 못하면서, 당장 쫓아내야 하는 놈도 제대로 쫓아내지 못하고 있으면서, 야구 감독만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건 김수영 시인의 말마따나 스스로가 참 작게 느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