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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큼 적으냐

혜리 님께 보내는 여덟 번째 교환일기

by 헤비

1. 오늘의 이야기는 일종의 고해성사 비슷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공개적인 장소에 이런 글을 남기는 게 저를 넘어서 혜리 님께도 안좋은 일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참을까 했는데, 이 나이를 먹도록 무언가를 잘 참는 법을 배우지 못했나봐요.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창을 열고 자판을 두드려요.




2.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듯 지난해 12월 3일에 벌어진 그 일 또한 나름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어요.


일단 허무해요. 물론 허무함은 좋은 감정은 아니죠. 허무함이 턱밑까지 차면 온 몸에 힘이 탁 풀리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멍한 상태가 되곤 해요. 유튜브를 보고, 넷플릭스를 틀어놓고는 있지만 눈과 귀가 닫혀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 허무함이 씻고 지나간 자리를 보면 남은 것과 헝클어진 것과 쓸려 나간 것들이 있더라고요. 제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이 가진 진짜 무게를 보여준달까요?


또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의 바닥이 얼마나 하찮은 상태였는지를 연일 확인하고 있어요.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살얼음판 위였어요. 심지어 몇몇은 자기는 사실 사람이 아니라 아가미가 있다며 그 살얼음판을 깨버리고 물 아래로 뛰어들어요. 놀랍도록 세상이 투명해지는 기분이에요. 어쩜 저렇게 뻔뻔할까 싶은데, 저것들이 진짜 사람이 아닌가보다 하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하고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조금 깊어진다는 느낌도 들어요. 조선이란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을 때의 사람들을 생각해보고, 나라를 빼앗겼을 때의 사람들을 생각해보고, 해방정국의 혼돈 속에서 나라가 찢어지고 심지어 전쟁을 겪었어야 했을 사람들과 독재치하에서 짓눌린 사람들을 생각해요. 그리고 겉으로는 독재가 끝났지만 자본에 의한 계급제가 고착화 되고 있는 오늘을 생각하죠. 매 순간마다 누구는 싸우고, 누구는 버티고, 누구는 외면하고, 누구는 타협하고, 누구는 부역하지만 그 모두가 다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 생각해요.




3. 어제는 일이 있어서 출근을 했는데 출근 전에 친구에게 집회에 갈 거냐고 물어봤죠. 차라리 제가 가자고 했으면 움직였을 텐데 이번에는 어찌할지를 물어봤더니 친구도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일을 마치고 퇴근길 천변을 따라 걸어왔어요. 토요일 오후,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따라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내달렸어요. 다들 살겠다고 뛰고 있고, 저도 몸 속에 흐르는 기름기를 조금이라도 덜어보겠다고 땀을 내며 길을 걷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 소리를 지르고 있겠구나.


그런데 저는 길을 걷고 나와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와중에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간이판매대에서 로또를 샀어요. 토요일 오후에 바깥을 돌아다니다 로또 판매대가 보이면 못해도 만원 어치는 사서 지갑에 집어넣게 된단 말이죠. 이건 심지어 제가 믿는 신앙과도 좀 거리가 먼 일인데 이조차 지나칠 수가 없어요. 그러며 생각을 했죠.


'로또 1등이 당첨 되고 그 놈이 탄핵이 안되버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문득 요걸 주제로 소설을 써도 괜찮겠다 생각을 했어요. 문제는 이게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을 때 진짜 난 어떻게 하려나 싶은 거죠. 모른척 당첨금을 찾고 어느 풍경 좋은 시골에 틀어박혀 세상 나몰라라 하고 살아도 될까요? 아니면 로또를 동생에게 던져주고 조카들 잘 키우라는 말을 남기고 투쟁을 하러 거리로 나서게 될까요?




4. 한국은 개개인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족이 아닌 돈에 두는 유일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어요. 돈이면 안될 일이 있겠나 싶고, 돈으로 안되는 일은 가지고 있던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농담도 자주 듣죠. 문제는 이 농담들 속에 뼈가 있다는 거예요. 아닌 척 하는데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예전 직장 동료분이 왜 결혼을 안하느냐고 물어보시길래 이 이야길 했어요. 울 어머니가 여자 고생시킬 바에는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당연히 그 말을 하셨을 땐 아버지와 한바탕 돈 문제로 크게 다툼을 하신 이후였는데, 그 말이 어린 제게 은근히 세게 박혔죠. 실제로 글 쓴다고 고집을 부리며 경제적인 문제를 한동안 내팽개치고 살아와서 결혼은 제 인생의 선택지에서 페이드아웃으로 사라졌는데, 이제와 어머니는 가끔 되물으세요. 왜 결혼을 안하느냐고. 그럼 전 그냥 대답없이 웃기만 해요. 예전에 나한테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답을 해버리면 비수를 꽂는 꼴이 될테니까요.


그런데 진짜 돈이 생기면 결혼이 되나요? 그건 아니잖아요. 사랑도 돈으로 사겠다고 '얼마면 되냐?'고 묻는 건 원빈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저는 얼마면 되냐고 물어봐야 답도 안나온단 말이죠. (으음, 물질만능주의에다 외모지상주의까지...)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린 어느 순간 이후로 세상 모든 것을 자판기로 바꿔버린 건 아닐까요? 돈만 넣으면 행복이 나오고, 돈만 넣으면 애인이 나오고, 돈만 넣으면 가족도 나오고, 돈만 넣으면 나 자신이 나온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요?


그 자판기에서 뽑은 현실이 고작 이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돈을 마련한 후 새로운 자판기를 향해 달려가려고 용을 쓰고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5. 여튼 로또는 자연스럽게 모두 꽝이 됐고, 전 이렇게 글을 써요. 문득 떠오르는 김수영의 시를 또 읊어보죠. '난 진짜 적구나. 간장종지는 나에 비하면 태평양이구나.' 하면서.


출근 길마다 공기 속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최루탄 냄새와 주인모를 피비린내를 헤집고 걷는 기분이에요. 그런데 그 감각이 도리어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지냈던 진짜 현실인 것만 같아서, 현실이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려야 도리어 현실감각이 살아나는 것인가 싶어 종종 쓴웃음을 짓죠.


그러며 또 생각하죠.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는 일이라는 건 결코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렇기에 이 글을 닫기 전 다시 한 번 혜리 님의 무탈한 하루를 간절히 빌어요. 혜리 님의 무탈한 하루가 이루어지는 조건이 세상 모든 간절한 수식어들을 퍼즐조각 맞추듯이 다 끌어모아 한 문장에 담는 것이라고 하면, 하루 종일 사전을 뒤적거리고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아요. 이 마음과 말들이 혜리 님의 현실을 행복의 방향으로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라도 이끌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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