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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혜리 님께 보내는 열한 번째 교환 일기

by 헤비

1. 개인적으로 꽤나 무턱대고 혜리님과 제가 생각하는 패턴이 닮아있다고 믿고 살아오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이 가장 다른 점은 아무래도 혜리님은 무신론자고 저는 유신론자라는 걸 거예요. 어쩌면 성별이나 나이차이보다 이 차이가 가장 큰 차이 아닐까 싶기는 해요.


물론 이 지점에서 재미있게 생각하는 점도 있어요. 이런 비유가 조금은 불경죄일 수도 있지만 너무 적확해서 안쓸 방도가 없는데,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를 떠올리면 저는 '금연'이 생각나요. 무신론자는 매일매일 금연 날짜를 세고 있는 금연자 같아요. 몇년 전인가 유튜브 방송을 하는 침착맨 님이 매일마다 방송화면 한 쪽에 "금연 000일차"를 써놓고 방송을 했어요. 그걸 보고 누가 그러더군요. 저거 백퍼센트 실패한다. 맞아요. 금연 일차를 적는다는 건 담배 생각밖에 안한다는 뜻이죠. 반대로 유신론자는 담배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흡연자가 생각나요. 흡연자라고 하면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막상 만지작거리기만 하지 잘 피우질 않아요. 막상 피워도 겉담배죠. 일종의 패션인 경우가 많아요.




2. 그런 의미에서 오늘 유신론자인 저는 꽤나 오랜만에 기도를 했는데 (물론 식사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립니다만 개인기도를 한 적은 너무 오래되어놔서) 첫 마디가 "죄송합니다." 였어요. 생각해보니 이렇게 개인기도를 한 게 올해는 처음인 거 같은 거죠. 순간 가슴이 쿡 찔려서...


그래도 기도 내용은 정해져 있어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가장 많이 하죠), 가족들 일과 건강 이야기 하고, 그리고 친구들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엔 나라 이야기 좀 하고... 제게 기도는 편히 툭 터놓고 속이야기하는 시간이라서 오랜만에 해도 주저리주저리가 좀 길어져요. 그러다 막판에 혜리님을 위해서 기도를 할까 하다가 잠시 멈칫거렸어요.


멋대로 해도 그만인 일이겠으나 아무래도 한 번은 허락을 맡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혹시라도 무슨 내용으로 기도를 해달라는 답이 돌아오면 더 좋을 테고요. 반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하실 수도 있죠. 뭐 어느 쪽이든 다 혜리님의 생각대로, 편한대로면 좋을 거 같은데, 내맘대로 하는 게 가장 안 좋지 않나 싶어졌어요.


하지 말라고 하셔도 기도하다보면 또 제 마음이 제멋대로 멈칫멈칫 할 수도 있죠. 그 멈칫멈칫이 기도가 될 수도 있는 거고요.




3. 그저 무탈하고 무난한 시간들이실 거라 믿고 있었기에 도리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고요한 호수에 돌 던지는 기분이라 더더욱 그랬죠. 그러다 혜리님의 소설을 보고 다시 보았어요. 머릿속에 여러 그림체를 가지고 있는 건 작가지망생 입장에서는 꽤나 부러운 재능인데, 마음과 기억에 그렇게 여러 그림체가 놓여있는 건 아픈 일이어서 괜히 혼자 발만 동동 굴렀어요.


그래도 혜리님이 다 잘 해낼 거라고 혼자 멋대로 믿고 있어도 괜찮은 거겠죠?




4. 저는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어서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정말 기도하는 법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생부에 무척 제 스타일인 여자 동기가 나타난 거예요. 알고보니 한 살 위 부회장 누나 동생인데 다니다 말다 한다는 거죠. 그날부터 그 아이를 적극적으로 꼬드겨서 밥도 사주고 놀러도 다니고 해서 교회에 데려다 앉혔어요. 심지어 여름방학 수련회도 같이 갔어요. 너무 좋았죠. 뭐 그땐 그런 게 가장 좋을 때니까요.


그런데 수련회 저녁때 나란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 아이가 기도를 하면서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순간 급 당황을 했어요.


'뭐지? 난 기도하면서 울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얜 뭐야?'


괜히 억울해지고, 이건 아닌거 같고, 뭔가 잘못된 거 같고, 내가 그 동안 교회에 들인 시간들이 헛수고인 거 같아 순간 화도 나고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어요.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게 제 평생 처음으로 제대로 한 기도였다는 걸 3년쯤 후에야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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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런 생각을 갖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닌데 지금 문득 무척 멀리 있는 혜리님에게 난 어린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기도했던 그 마음으로 글을 써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듬고 다듬고 다듬고 다듬어서 말을 예쁘게 만들어야 들어줄 거라는 생각을 갖고 너무 다듬다보니 제 마음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말들만 늘어놓았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죠.


거칠고 뭉툭해도 마음에 있는 그대로를 주는 게 맞지 않았으려나 싶은데, 모르겠네요. 혜리님 생각에는 '그게 다듬은 거였어요?'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 밤 다시 잠들기 전 화살기도라도 하게 된다면 뭉툭한 마음을 보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겠어요. 그리고 그 뭉툭한 마음이 제발 아무도 다치지 않을 풀밭이나 호수 구석에 떨어지길 바랄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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