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는 당연하게도 무라카미 하루키다. 한국 소설가로 줄이면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고, 한강 작가의 작품들도 어느새 다 챙겨봤지 싶다.
그럼 당연히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중에서 나올 거 같은데, 조금 쌩뚱맞게도 난 오늘 소개할 이 「로드(the Road)」를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말해야하지 않나 싶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로드」는 이길 수가 없다.
조카님들을 보러 가려 했는데 동생이 여행계획이 잡혔다며 다음에 오라 하여 할 일이 없어진 주말, 꼭 이럴 때면 출근 시간에 맞춰 잠이 깨곤 한다. 일어나 캡슐커피를 내리고 아침대신 주전부리를 들고 올라와 밀린 '지구마불 세계여행 시즌2'를 보았다. god 박준형이 곽튜브와 함께 포르투갈의 나자레에 가는 편이었는데, 파도를 보고 눈물을 터뜨리는 중년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더라. 인종차별을 받던 어린 시절, 파도만이 자신의 유일한 피난처였다고... 난 파도를 타진 못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빅웨이브를 보러 나자레에 가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꿈이란 그렇게 다른 이를 끌어당길만큼 무겁고도 아름답다.
못 본 TV 프로그램도 다 보고 나니 또 무료해져서 이제 책을 볼까 했는데 막상 손이 가는 책이 없었다. 다 보겠다고 사놓고, 빌려놓고 왜 이러는지. 그러다 집어든 게 민음사에서 나온 「알베르 카뮈 디에센셜」이었다. 역시나 첫 작품은 가장 유명한 「이방인」. 난 책을 펼치기 전 손에 든 채 좁은 방안을 서성거리며 전람회의 「이방인」을 흥얼거렸다. 이쯤됐으면 준비운동이 다 됐다 싶을 때 펼쳐야 한다. 카뮈는 그런 존재다.
「이방인」은 다 읽었다. 언제나 느끼거니와 함부로 덤벼서는 안되는 빅웨이브 같은 알베르 카뮈. 그새 빗소리는 커졌고, 방 안엔 습기가 가득 차올랐다. 나머지 카뮈의 에세이들을 읽을까 하다가 책갈피를 꽂고 덮었다. 이대로 더 읽다간 마음이 하염없이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까닭이었다.
카뮈는 '희망을 버리라'고 한다. 물론 그건 단순하게 '어차피 망한 거 다 같이 숨 참고 한강 다이브'는 아니란 걸 안다. 그는 삶을 사랑하고, 또 삶을 '삶'이게 하기 위한 절망을 말한다. 곰곰히 생각하면 우리가 희망이라 생각하고 붙잡고 있는 것에 대해 카뮈는 '희망의 실체'에 대해 고민해보았는지를 물어보는 것 같다. 그렇다. 때론 우린 희망이란 단어를 고민과 고뇌를 지우는 도구로 사용하니까. 허나 나는 그의 말에 머리로는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도무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낡은 사람이다. 난 희망이란 단어를 너무나 사랑한다. 그 단어의 음소音素 하나 조차도 잃어버리고 싶지가 않다. (카뮈의 나머지 이야기는 맑은 날 다 읽고 또 하게 되지 싶다.)
그래서, 희망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급히 펼쳐든 책이 바로 이 코맥 매카시의 「로드」였다는 이야기가 이리 길어졌다.
2. 이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신 분이라면 내 이야기에 순간 "이 새끼 뭐하는 새끼지?"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더한 비속어를 쓰실 수도 있는데) 다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책을 요약해보면 희망과는 몇 백 광년은 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인다.
세상이 멸망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핵전쟁쯤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생명체가 멸절해버렸다. 어쩌다 인간들만 살아남게 된 건지 자체가 의문이다. 잿빛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추위를 피해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다.
아이는 도시가 불타던 날 태어났다. 아이의 엄마인 여자는 남자의 손에 끌려 피난길에 올랐는데 그 와중 시력을 잃어버렸고, 결국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계속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간다. 몇 년 째 그렇게 걷고 있는 건지조차 이제 잊어버렸다. 그 길에서 배고픔과 위협과 온갖 잔학함 앞에 그들은 고스란히 던져진다.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데 작가 코맥 매카시는 일절 자비가 없다.
2023년 개봉했던 한국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인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면서 난 계속 이 「로드」를 떠올렸다. 그때 난 인스타그램 영화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안심해도 된다. 이 영화는 물지 않는다. 일견 사나워 보일 수 있지만, 목줄은 단단하고 심지어 입마개마저 채워져 있다. 이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이지만 제목에 당당하게 제시되어 있듯 유토피아를 말하는 영화다. 괜찮다. 잘 길들여져 있으니 안심하고 손대도 된다."
전쟁 아포칼립스는 인간을 잘 보여준다. 이건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는 현실이다. 난 보스니아 내전을 경험한 사람의 수기를 읽어 본 적이 있다. 신뢰할 수 있는 가족구성원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가 적이 된다. 확인되지 않은 존재를 사살하는 건 자기 방어의 기본이 된다. 집안에 있는 책이며 가구 같은 '연료화'가 가능한 대부분의 물질은 추위을 버티는 데 모두 사용된다. 여성의 성은 라이터를 채우는 기름이나 당장의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식량과 교환이 가능한데, 이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게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이었다고도 한다.
그리 생각하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15세 관람가의 진짜 유토피아다. 거기엔 폭력과 살인 정도는 있어도 노예도, 강간도, 식인도 없으니까. 코맥 매카시는 아이를 피범벅으로 만들고, 인간식량창고를 지나고, 도시가 불타던 날 지옥에 갇혀버린 듯 말라 비틀어져버린 시체 앞에 던지기도 하고, 쇠사슬을 차고 발가벗겨진 채 끌려가는 노예 행렬을 보여주는 일에 절대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난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이 소설을 꺼냈다.
3. 이십대 후반의 3~4년 간은 매일매일 삶의 벼랑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던 그 일 년 여는 어떻게 지났는지조차 모르게 회색빛으로 가득차 있다.
그때 난 '자살'이라는 단어를 마치 저글링하듯 손으로 가지고 놀았다. '죽고 싶다'가 아니라 '끝나면 편하겠다.' 였던 시절. '한 번에 확실히 끝내고 싶은데 안 끝나면 곤란할 것 같아.'라고 생각했던 시절, 죽고는 싶은데 죽을 기력이 남아있지 않아 그냥 살아있었던 시절이었다.
답이 없었다. 마침표가 필요했다. 그 어디에도 구원이 없어서 기도의 대부분은 욕과 한숨으로 채워졌다. 부모님의 알량한 명예욕을 채워드리려 교회를 다녔다. 그날도 그랬다. 서른이 되었던 첫 날, 송구영신 예배를 마친 난 컴컴한 성수동 공장거리를 홀로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지금처럼 뭔가 패셔너블하고 외국인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거리가 되기 전이다.) 밤새 어딜 그렇게 헤매다 그 길에서 새벽을 맞았는지는 여전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새벽 공기가 너무나도 청량했다. 폐속에 스며드는 냉기가 하염없이 좋았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가슴 속에 맺혀있던 한숨들을 하얗게 내려놓았다. 파랗게 밝아오는 길을 걸으며 난 계속 그 길을 그냥 걷기로 했다. 걸어도 될 것 같았다. 이렇게 한순간에 털어내도 괜찮은 건가 싶을만큼 이상한 변화였다. 어느새 정말 오랜만에 웃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답은 찾지 못했다. 여전히 내 손에는 답이 없다. 삶은 여전히 무겁고 버겁다. 길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내 기도는 한숨과 탄식 뿐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변했다. 어떻게든 계속 걸어보기로 했다, 그 것 뿐이다.
이 소설에는 희망의 불씨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런 증명도, 근거도 없다. 남자는 아들에게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린 아들 조차 그 말을 굳건히 믿어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추위와 위협, 그보다 더 잔혹한 절망으로부터 도망칠 길이 그 나약한 희망 하나 밖에 없으니까 그걸 애써 가슴에 품고 무작정 걷는다.
이런 것도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4.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의 대부분은 원인과 결과로 해석이 되기 마련이다. 현재가 있다는 건 현재가 있는 원인이 있다는 뜻이다. 시간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빅뱅이론이 나올 거고, 난 개인적으로 그 이론이 현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과학이론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몇몇 분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뜰 거다. "당신 교회 다닌다고 안 했어?" "당신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다. 난 여전히 기독교인이고 예수를 믿는다. 과학과 기독교는 '불가지론' 쯤에서 타협이 가능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난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세상은 과학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은 도무지 인과율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살다보니 어렴풋 왜 사는지 알 것 같은 정도일 뿐, 왜 살아야하는지 그 이유를 완벽하게 알아서 인생을 살아내는 경우는 없다. 인생이 이유를 모른채 오늘도 이어질 수 있다면, 희망도 어떤 이유나 근거가 필요하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있다. 난 희망은 세상의 인과율 너머에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이 끔찍하고 참혹한 세상의 종말과 함께 태어난 소설 속의 아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게 스스로 끝없이 인간이고자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아이를 구하려고 하고, 늙은이가 보이면 먹을 것을 나눠주려고 한다. 자신에게 위해를 끼쳤던 도둑을 죽이는 일을 막으려고 하고, 사람만큼은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려고 한다.
이 아이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가? 아니다. 이 세상을 회복시길 가능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아이는 그저 평범한 아이일 뿐이다. 힘이 없고 나약하다. 아버지의 보살핌이 아니면 당장 살아갈 방도가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아이는 늘 대책없이 인간이고자 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이는 아이답게 나약해지지만, 아버지는 그제야 그들이 품고 있었던 나약한 희망이 어떤 삶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환경을 찾아내는 일이 아닌 '인간성' 그 자체라고 고백한다. 놀랍지 않은가? 세상은 끝났는데, 인간성은 남아있다. 모든 조건이 사라지고 그 어떤 위로와 보살핌이 없는 곳에서조차 인간성은 빛나고 있다. 그게 그들이 옮기고 있던 희망이요, 불꽃이었다.
이 시대는 끝없이 인간을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난 그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 우주의 모든 먼지를 뒤져보아도 우리가 가진 '인간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난 여전히 인간성의 경이로움을 부정할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이 '인간성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에 복무하고 싶다. 사실과 싸우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은 사실의 일을 하시라, 난 내 일을 할 뿐이다.
이 책은 그렇게 희망을 말한다. 세상은 끝나도 희망은 끝나지 않는다.
5. 일흔이 넘은 코맥 매카시에게는 당시 열 살이 안된 아들이 있었다. 두 사람이 엘파소의 어느 한 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아들이 잠든 사이 매카시는 동네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오십 년이나 백 년 후 이 마을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산 위에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모든 것이 다 타버린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역시나 사람을 총이 아닌 소 도축용 공기총으로 죽이고 다니는 킬러를 떠올리는 소설가답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안톤쉬거의 구체적인 이미지가 코맥 매카시의 것인지 코엔 형제의 각색인지까지는 원작을 본지 하도 오래 되어놔서 사실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그러나 그 옆에는 잠든 아이가 있었다. 언젠가 늙은 아비의 곁을 떠나 삶의 불길을 홀로 헤치고 걸어나가야 할 아이에게 아버지는 결국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자 하나하나마다 서부황야의 모랫바람을 고스란히 담아내던 그였음에도 이 일만큼은 어쩔 수 없었을 테다. 역시 그런게 인간이다.
별은 까만 밤하늘 속에서 더 밝게 빛난다. 별똥별을 보러 가고 싶으면 가로등도 없는 시골 어딘가를 일부러 찾아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안다. 한낮에도 여전히 별은 빛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이것은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렇다.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 있는 것은 있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아무리 찾아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아무 이유 없이 그대여... 오늘 이 하얗게 캄캄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 아름다운 별이 되어 빛나고, 꿈꾸고, 온 우주보다 더 큰 무엇을 하염없이 희망하시길. 그대는 그래도 괜찮다.세상보다 더 큰 희망이 그대를 감싸안고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