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무뎌지면,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버리거나 간다.
날이 서 있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고 믿는다.
사람의 감정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무뎌졌다고 해서 버려야 할 것도, 다시 벼려야 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무뎌짐은 더 오래 쓰이기 위한 준비다.
한때 매사에 예민했다.
누군가의 말끝 하나, 표정 하나에 마음이 요동쳤다.
“왜 나만 이렇게 예민할까”
“왜 이런 것까지 다 느껴질까”
스스로가 피곤해했다.
어느 순간부터 무뎌졌다.
말을 아끼게 되었고,
화를 내기 전에 한 번은 넘기게 되었고,
기대는 줄이고, 상처는 덧나지 않게 스스로 새살을 돋운다.
화가 안 나는 게 아니다.
울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무뎌진 것이다.
무뎌짐이 낯설었다.
공감이 떨어지는 사람인가 싶어서.
무정한 사람은 아닐까,
혹은 세상에 너무 지쳐서 포기해버린 건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됐다.
무뎌짐은 날선 칼을 바라듯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법을 익힌 흔적이다.
날이 서 있는 감정은 예리하지만,
자주 다치고, 쉽게 부서진다.
무뎌진 감정은 다치지 않으려 애쓰기보단,
그냥 조용히 기다림을 택한다.
그게 더 오래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살아낸 경험이 일러준 거다.
사람들에게 예전만큼 실망하지 않는다.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할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실망의 대상일 수 있다.
감정의 날을 세우기보단,
감정의 결을 쓸어내는 쪽이 편하다.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세상을 견디고 살아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