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연주회에서 사온 꽃다발이 나에게 준 선물은 음악보다 더 깊은 울림이었다. 투명한 화병에 정성스럽게 꽂은 꽃들은 처음 며칠간 집안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아련한 꽃잎들이 만들어낸 부드러운 분위기, 방 안을 맴도는 은은한 향기는 마치 아들의 연주가 계속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식탁을 바라볼 때마다 미소가 나온다. 꽃다발이 주는 마법이다.
시간은 현실이다. 며칠이 지나자 화려했던 꽃잎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떨구기 시작했다. 힘을 다한 듯 줄기를 따라 힘없이 내려앉는 꽃잎들을 보며 물을 갈아주고 줄기 끝을 잘라주었다. 잠시 생기를 되찾는 듯했지만, 처음의 싱그러움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색채도, 짙었던 향기도 흐릿해지고, 화병 속 물마저 탁해져갔다.
창밖으로 보인 뿌리 깊은 나무들이 기다렸다는 듯 생각을 물고 온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채 흔들림 없이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워내는 나무들의 당당함이 한 눈에 보인다. 지난주 내린 세찬 폭우에도, 거센 바람에도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모습이 화병 속 꽃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계절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나무들의 비밀은 보이지 않는 곳, 땅 속 깊이 내린 뿌리에 있었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순간의 빛남에 마음을 빼앗긴다. SNS에 올라오는 완벽해 보이는 순간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취들, 화려한 외양과 즉각적인 만족들에 말이다.
뿌리깊은 나무가 가져온 생각, 진정 오래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아름다움과 깊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과가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깊고 견고한 뿌리에서 나온다. 뿌리 없는 삶은 바람 한 자락에도 쉽게 흔들리고, 순간의 화려함이 사라지면 꽃다발처럼 곧바로 시들어버린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본질적인 힘이 없어 지속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내 삶의 뿌리는 무엇일까.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천천히 물어보았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신념들, 변치 않는 가치들이 바로 삶의 뿌리일 것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 정직함에 대한 고집, 성장하려는 의지, 이런 것들은 때로 보잘것없어 보이고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들이었다.
삶의 폭풍이 몰아칠 때 나를 잡아주는 것은 화려한 명성이나 외적인 성취가 아니다. 내 안에 깊숙이 내린 견고한 뿌리, 그것이 나를 지켜주는 진정한 힘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교만하지 않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절망하지 않게 해주는 것도 바로 이 뿌리들이다.
화병 주변으로 흩어진 꽃잎들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순간의 화려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은은하게 빛나는 삶을 살고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며, 삶 깊숙이 뿌리 내린 나다운 삶을 채워나간다. .
아들의 연주회에서 사온 꽃다발은 이제 역할을 마쳤지만, 그것이 내게 준 깨달음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창밖의 나무들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뿌리를 키워가는 삶. 이 여름이 나에게 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같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