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소와 기억을 엮는 서사의 길쌈꾼, 소피 블랙올

by 행복한독서

소피 블랙올은 2003년에 『루비의 소원』으로 에즈라 잭 키츠상을, 2016년과 2019년에 각각 『위니를 찾아서』『안녕, 나의 등대』로 두 차례 칼데콧상을 수상하며, 독창적인 시각 언어와 윤리적 성찰을 겸비한 보기 드문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언뜻 보면 그는 전통적인 수채화 화풍을 계승하는 수많은 작가 중 한 명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블랙올의 그림책은 역사와 기억, 장소성과 공동체에 관한 깊은 탐구와 치밀한 고증을 단단한 토대로 삼고 있어요. 블랙올은 마치 솜씨 좋은 길쌈꾼처럼, 장소의 역사성과 개인적 기억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울림 있는 이야기를 직조합니다.


이러한 소피 블랙올에게도 중요한 시험대가 되었던 작품이 있었어요. 바로 2015년 발표한 『산딸기 크림봉봉』(씨드북, 2016)으로, 네 시대와 네 장소를 배경으로 하나의 디저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음식을 매개로 삶과 문화의 변화를 조명하는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노예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 흑인 모녀의 일상을 밝게만 묘사하며 역사적 고통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비평적 논쟁을 넘어 ‘그림책이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 사건이었어요. 동시에 블랙올이 역사적 사실을 단순한 장식적 요소로 활용하지 않고, 철저한 자료 조사와 물질적·정신적 흔적을 서사 속에 치밀하게 반영하도록 이끈 전환점이 되었지요. 그 성찰의 결실이 바로 『안녕, 나의 등대』(비룡소, 2019)와 『언덕 너머 집』(비룡소, 2023)입니다.


수직의 공간과 시각적 리듬

『안녕, 나의 등대』는 자동화로 소멸해 가는 등대와 그곳에서 살아간 한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장소의 역사성과 공동체 안에서 돌봄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냅니다. 블랙올은 이 책에서 일관성과 변화를 병치하는 시각적 구도를 활용했어요. 여덟 장의 펼침면에서 동일한 위치에 배치된 등대는, 변화무쌍한 주변 환경과 대비되는 ‘불변의 축’으로 기능합니다. 새침한 봄바람, 사나운 여름 태풍, 위험한 가을 안개, 얼어붙은 겨울 바다, 그리고 고래가 유영하는 은빛 바다와 에메랄드빛 장막이 너울대는 밤하늘 등 변화와 혼돈의 풍경 속에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는 등대의 모습은 버지니아 리 버튼의 고전 『작은 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림6-안녕, 나의 등대.png ⓒ비룡소(『안녕, 나의 등대』)

블랙올은 수직성과 원형이라는 등대가 가진 두 가지 구조적 특징을 포착하여, 이를 서사의 시각적 리듬으로 전환합니다. 수직으로 길게 뻗은 등대의 건축적 형태는 책의 세로로 긴 판형에 반영되어 변함없고 안정적인 인상을 줍니다. 내부의 원형 구조는 원형 그림, 둥근 식탁과 카펫, 나선형 계단, 원을 그리며 융기하는 파도 등과 공명합니다. 이 반복적 모티프는 독자의 시선을 상하좌우, 때로는 원운동으로 이끌며 독자가 시간의 흐름을 역동적이고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또한 여덟 장의 펼침면에서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Hello! Hello! Hello!”(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여기예요!”와 “안녕!”으로 번역됨)는 시청각적 리듬을 형성합니다. 이를 통해 등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중심에서 인간의 삶을 돌보고, 품고, 지탱하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나아가 이 작품은 ‘돌봄’이라는 주제를 단순한 윤리적 당위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에서 조명함으로써 동시대 그림책 지평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합니다.


장소성의 아카이브와 기억의 재료

『언덕 너머 집』의 이야기는 뉴욕주에 위치한 한 폐가에서 출발합니다. 블랙올은 우연히 들어선 낡은 농가에서 벽지 조각, 손바느질 드레스, 빛바랜 노트와 그림 등을 발견했고, 이 작은 흔적들을 실제 작품의 재료로 삼아 그림 속에 녹여냈습니다. 책을 펼치면 독자는 마치 오래된 집 안으로 초대된 듯 방과 방을 거닐며 가족의 일상과 숨결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는 블랙올이 실제 집의 평면도를 바탕으로 공간과 장면을 정밀하게 대응시킨 결과로, 독자는 ‘책장을 넘기는 행위’ 자체를 집을 거니는 경험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그림6-언덕 너머 집.png ⓒ비룡소(『언덕 너머 집』)

텍스트도 독특합니다. 원서에서는 마지막까지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기억의 연속성과 흐름을 언어적으로 구현한 이 전략은, 독자가 집이 간직한 시간을 끊김 없이 오롯이 느끼게 합니다. 또한 벽지, 천, 신문, 낡은 종이를 덧붙인 콜라주 기법은 장소가 쌓아온 층위들을 촉각적으로 드러내며, 그림책이 단지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을 보존하는 아카이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축적된 삶의 흔적을 품은 기억 저장소이자 공동체가 구축한 이야기 보관소입니다. 블랙올은 폐가가 된 한 농가를 애도하는 동시에, 그 잔해들을 재료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길쌈하듯 엮어냈습니다. 이는 『산딸기 크림봉봉』 이후 역사적 재현을 둘러싼 논쟁을 거치며 다져온 그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실제 주민의 증언과 공동체의 목소리를 반영한 이 책은 허구와 사실, 예술과 기록의 경계를 허물며 그림책이 기억을 지키는 윤리적 장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김난령_번역가, 그림책 연구가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책으로 배우는 노년의 다채로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