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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봉이라서 가능한, 나라서 가능한

by 행복한독서

면봉이라서

한지원 글·그림 / 52쪽 / 15,000원 / 사계절



대량생산된 소모품으로서의 면봉은 쉽게 쓰이고 버려지며,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사소한 오브제가 그림책의 주인공이라니, 귀가 솔깃해지지요. 그림책 속 면봉은 광부, 의사, 수리공, 청소부 등 다양한 역할로 변주됩니다. 희미한 존재감에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모습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와 닮았습니다. 작고 가벼운 면봉의 변신은 유머러스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서사는 단순한 반복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이야기 중반에 이르러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나지요. 몇몇 면봉 친구들이 사라지고, 그중 하나는 성공한 모델이 되어 돌아옵니다. 평범한 자리에서 벗어나, 화려한 세계에서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요. 이를 지켜본 ‘나’ 면봉은 자기 존재를 성찰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도 한때 예술가를 꿈꾸었고, 타인의 재능을 부러워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은 특별하지 않고 쉽게 부러지기도 한다고요. 어느 순간 면봉은 온몸으로 “끝”이라는 글자를 그려내며 존재의 불안과 덧없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끝에서 면봉의 인생에 대한 사유가 새롭게 열립니다.

“그래도 끝났다고는 생각하진 않아.”

“쫌 재밌고 쫌 설레는 일들이” 다시 찾아올 거라 믿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자신을 부정하는 대신, 평범함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태도로 나아가지요.

그림2-면봉이라서_본문.png

우리는 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불행하다고 여기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평범함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함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특별함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수식이 아니라, 평범함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면봉의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면봉이라서’ 가능한 것, ‘나라서’ 가능한 것. 그것이야말로 각자가 지닌 특별함일 것입니다.


이 그림책은 작업 방식 또한 독특합니다. 물감과 연필로 그린 배경 위에 실제 면봉을 올려 실사 촬영한 방식은 사소한 사물을 낯설고 특별하게 보이게 합니다. 덕분에 면봉의 독백은 현실성과 상상력을 동시에 품으며, 더욱 생생하고 울림 있게 다가옵니다.


『면봉이라서』는 아이들에게는 유쾌한 사물 의인화 이야기로, 어른들에게는 철학적 우화로 읽힙니다. 표면적으로는 가볍고 유머러스하지만, 그 속에는 평범성의 재발견과 존재론적 성찰이 숨어있습니다. 소외된 사물의 목소리를 빌려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시적 철학을 구현하면서도, 이야기를 아주 능청스럽고 재치 있게 풀어내지요.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성취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서랍 속 면봉이 나직이 속삭입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평범함 속에, 나라서 가능한 특별함이 숨어있다고. 그러니 오늘 면봉을 꺼낼 때, 잠시 귀 기울여 보세요.


제님_작가, 번역가, 『그림책의 책』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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