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림책작가의 세계 - 권정민
권정민의 첫 작품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는 내게는 대단히 새롭고 유쾌한 그림책이었다. 인간의 개발 열풍으로 야생 보금자리를 잃은 멧돼지들 이야기란, 사실 ‘유쾌’와는 거리가 먼 우울하고 마음 무거운 소재다. 그들이 도시로 스며들어 가 속옷 바람의 가족을 몰아내고 아파트 한 채를 보금자리로 확보한다는 전개도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입장 바꿔 생각하기’의 활용이다. 하지만 권정민에게는 유머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멧돼지에게는 불도저가 성가신 모기 정도이고, 아파트 점거는 사랑의 쟁취로 보이게 만드는 유머가. 그리하여 현실에서는 굶주리며 쫓겨 다니고 사냥당하는 멧돼지를 지혜롭고 여유로운 승리의 자리로 데려다 놓는 통쾌한 반전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느긋한 유머와 경쾌한 역설이 내게는 권정민 작품 세계의 뼈대로 보인다.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은 아마도 그 뼈대가 가장 굵직하고 단단하게 드러나 있는 책일 것이다. 동물과 위치가 완전히 뒤바뀐 인간이 사육, 전시, 추방, 사냥, 해부 등을 당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이 책은 느긋함, 경쾌함이라는 피부도 벗어던진 채 서슴없이 뼈를 날리고 있다. 보는 독자가 통증을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이 통증은 작가가 독자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향해 쏜 화살에서 나왔으며, 작가에게 공감하는 독자가 함께 느끼는 것이다.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날카로운 성찰의 시선. 권정민 리뷰에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자기 성찰’이라는 개념은 유머, 역설과 함께 그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그는 아프게 파고들어 가는 시선뿐 아니라 연민(『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엄마 도감』), 조롱(『사라진 저녁』), 판타지(『시계탕』) 등이 섞인 다양한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해부하고 재구성하여 그림책을 만들어낸다. 보기 드물게 논리적이고 지적인 이 시선의 책들은 점점 높이 주목받고 평가받으며 한국출판문화상(『엄마 도감』), 대한민국그림책상 대상(『사라진 저녁』)을 수상했다.
성찰적이고 논리적인 작가답게, 그는 인터뷰 전에 질문을 미리 줄 것을 요청했다. 2년 가까이 인터뷰한 많은 작가들 중 처음이었다! 당황한 나는 의례적인 질문 세 개를 보냈다.
나는 왜 그림책이라는 장르를 택했나,
그림책을 통해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나만의 개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인터뷰 자리에 마주 앉은 그는 단도직입,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뛰어들어 갔다. 어려서부터 그림에도 글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미래나 직업에 대한 뚜렷한 전망도 없이 점수에 맞춰 ‘응용동물과학과’에 갔지만 학과 공부보다는 그림 동아리에 더 열심이었다. 피디가 되고 싶었지만 차선으로 방송작가가 되었다. 불안하던 시기에 강렬한 그림책을 만났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 그토록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세계를 처음 보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 단순함과 완벽함이 자신과는 반대되는 것 같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자신 안의 어떤 것이 건드려진 게 아닐까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그림책 인생의 도화선이 ‘역설’이었던 셈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림책 세계를 헤맸다. 늦게 시작했으니 빨리 두드러져야 한다는 압박, 어린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책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불안, 세상에 새로운 메시지는 없으니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극단적일 정도로 새로워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예민하게 보낸 시절이었다. 화분에게 감시당한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 예민함을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의 부드러운 역설 안에 실어 넘겼다. 『엄마 도감』에서는 예민함에 더한 피로감을, 아이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역설에 더한 자기 풍자로 웃어넘겼다. 그러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답은 결국 내 삶과 연결되어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를 고려하거나 다른 이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할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파고들어 갈 것.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이 자기 생각과 느낌과 태도에 대한 질문을 퍼붓는다고 한다.
그의 책들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사라진 저녁』은 코로나 팬데믹 시절 문득 엘리베이터에 가득 탄 사람이 자기 외에는 모두 배달원들이더라는 오싹한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오싹함, 재활용장의 산더미 같은 일회용기를 보았을 때의 혐오감을 그는 자기 자신에게 돌렸다. 큰 상을 받았지만,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풍자와 칼끝을 스스로에게 향하게 만드는 예리한 비판이 아무래도 독자들에게는 불편했는지, 시장에서의 호응은 그에 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자기비판은 책이 갖는 기능 중에서 가장 숭고하고 값진 기능이 아닐까.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은, 남은 아랑곳없이 자기 가치를 극대화하겠다는 욕망에만 골몰하도록 몰아가는 현대사회의 사악함과 맞서 싸워야 하는 우리에게 가장 든든한 무기이자 지원군이 아닐까.
『사라진 저녁』이 브라질로 수출되었다는 소식은 그런 자기반성이 바깥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증거인 듯해서 뿌듯하다. 인권 그림책 시리즈 중 하나인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가 대만, 중국, 말레이시아로 나간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의 다른 책들도 부지런히 해외로 발길을 옮기는 중이다. 자기반성이 아주 시급해 보이는 나라로 그의 책이 퍼져나가기를 강력하게 바라고 싶어진다. 다른 나라만 언급할 일은 아니다. 이 나라 안에도 자기반성이 필요한 인간군은 차고 넘친다. 우선 나부터!
김서정_작가, 평론가, 『어린이 책 번역이 쉽다고?』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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