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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와 협동으로 함께 준비하는 노후

by 행복한독서

나이 들고 싶은 동네

유여원, 추혜인 지음 / 384쪽 / 20,000원 / 반비



나는 작은 동네 의료기관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로, 동네 사람들의 주치의로 일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의료기관은 좀 독특한 곳인데 의료기관으로 찾아오는 분들도 진료하지만 중증의 장애인이나 와상의 어르신들에게 방문 진료를 나가기도 한다. 또 의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만든 의료기관,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다.


지난달에 우리 살림의원에 간호대 학생들이 견학을 나왔는데 학생 한 명이 내가 이번에 쓴 책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제목이 ‘늙어 가고 싶은 도시’였던가요?” 참지 못하고 웃음을 빵 터뜨렸더니, 옆에서 누가 교정한다. “아니야. ‘함께 나이 드는 마을’이야.”


쉬운 단어로만 제목을 만들면 이런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구나. 오히려 의미만 남고 정확한 단어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나 보다. 하지만 이건 약과다. 다른 친구 하나는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며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에게도 권해드렸단다. “엄마, ‘늙어가는 여자들’ 책을 보냈으니 잘 읽어봐요.” 이렇게까지 변형될 수 있는 건가? 사실 제목이 뭐라고 변형되든, 맥락은 비슷한지라 큰 상관이 없지만. 여하튼 이 책은 동네 주민들과 함께 『나이 들고 싶은 동네』를 만들어온 유쾌하고 왁자지껄하면서도 실험적인 이야기이다.

노후 준비를 위해서 저속노화와 재테크에 꽂힌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 노후는 혼자서는 아무리 준비해도 제대로 준비할 수 없는 것이라며 나이 들어서도 건강하고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안심할 수 있는 관계망을 미리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망을 쌓아온 15년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책이다.

동네1-데이케어센터.png 데이케어센터

의사로서 나는 협동조합을 하기 전에도 사람이 건강하게 나이 드는 데 있어 의료가 다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의료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의사도 큰 역할을 해야겠지만, 절대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머리로 알고만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면 15년이 지난 지금은 정말로 한 사람의 건강과 노후를 결정하는 데 있어 의료가 너무나 일부라는 사실을 체감해 가고 있다.


방문 진료를 하는 의사로서 나는, 어르신 엉덩이에 생긴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 의료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처치한들, 엉덩이에 체중이 실리지 않도록 자세를 계속 바꿔주는 이가 없다면, 새살이 잘 차오르도록 단백질이 풍부한 양질의 식사를 챙겨주는 이가 없다면, 욕창은 절대 낫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가고 있다. 독박 돌봄에 지친 보호자를 케어하기 위해 동네에 어떤 관계망이 만들어져야 하는지도 실감하고 있다.


우리 동네에는 ‘서로돌봄카페’가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민이 “어머니 모시고 갈만한 식당이 없어서 곤란하다”라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들이 함께 만들어서 운영하는 작은 모임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1,000원의 찻값을 내고 모인 어르신들과 함께 수채화 그리기, 훌라 배우기, 관절 가동 운동하기 등 여러 프로그램들이 자원 활동으로 운영된다. 같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교육을 받으며 어떤 죽음을 준비할지 생각을 나누기도 한다.

동네1-서로돌봄카페.png 서로돌봄카페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서로돌봄카페의 이용자로 관계를 시작했던 70대 후반의 이솔 님은 열심히 서로돌봄카페 활동에 참여하다 보니 어느새 카페의 운영자가 되기에 이르렀고, 노인 일자리에도 참여해 다른 어르신 댁에 방문하며 매일 운동과 인지 재활을 돕고 있다. 최근엔 카페에서 시작했던 수채화를 더 열심히 정진한 끝에 동네 수채화 모임의 전시회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 시작한 이들도 돌보는 이가 될 수 있는 관계의 순환이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나이 든 후에도 자신에게 익숙한 집, 익숙한 동네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한다. 흔히 얘기하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 AIP)’라고 불리는 이 바람을 위해서 사실 지금 한창 제도들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필요한 돌봄을 모두 제도화할 수도 없고 반대로 제도화된 돌봄이 충분히 제공되는 상황이라고 한들 온전히 ‘존엄한 돌봄’이 이루어졌다고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국가나 공공기관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제도와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으로서의 돌봄만으로는 우리가 바라는 ‘따뜻하고 존엄한 돌봄, 나다움을 지키는 돌봄’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후를 함께 준비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은 우리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국가나 기업이 해줄 때까지 마냥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내겠다는 ‘자조’의 정신과, 혼자서는 힘들지만 함께하면 할 수 있다는 ‘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니까.

동네1-흰머리 휘날리며.png 노인 여성 근력 강화 운동 ‘흰머리 휘날리며’

우리는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취약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취약함이야말로 우리의 약점이 아니라 연대와 협동을 위한 조건이다. 잘 돌보고 잘 돌봄 받기 위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혼자 늙는 것이 두렵지 않을 수 있도록 다양한 관계망을 만들고 돌봄을 순환해 나가는 실험을 계속하자. 평범한 사람들이 다정하게 세상을 바꿔나가는 동네에서라면 누구든 명랑하게 나이를 먹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지금 사는 동네가 『나이 들고 싶은 동네』이길 간절히 바란다.


추혜인_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주치의, 『나이 들고 싶은 동네』 공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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