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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숙 Sep 26. 2022

시 어머니 되고 보니

밴댕이 속 며느리, 마음 넓은 며느리

     

들이 모이는 날, 시어머니는 항상

집에서 키운 토종닭으로  마늘 듬뿍  백숙 했다.

찬밥이 남 때는 뜨끈뜨끈한 국물에 말아서 드신다며  먼저 어머니께서 챙겨가셨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 닭다리를 쭉 쭉 찢어서

먼저 떼어 주셨다.


첫아들 임신 때 시장 다녀오는 길에 참외, 수박, 과자, 빵 등 사 오셔서 제 방에  몰래  놓고 가셨다.

둘째 출산할 때는 11월이었는데  제법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산모가  움직이면 산후풍으로 고생한다고  대부분 남편에게 크고 작은 일을 시켰다.

세탁해 놓은 우리 빨래는 남편이 저녁밥을 먹은 후에 우리 방에 가져다 놓았다.

 큰 빨래가 있으면 남편더러 “힘 어디다 쓸래  겨울잠바는 니가 빨아서 입어라” 하셨다.

어머님이 아들에게 일을 시키니 저도 철없이 심부름을 시켰다. 그때는 저를 나무라 주셨다. 아니 “ 내가 일을 시킨다고 너도 시키냐” 하시면서 핀잔을 주셨다. 그때는 속으로 어머님 아들만 되나 제 남편도 되는데 부탁 좀 할 수 있지 하며 섭섭하게 생각했다.

     


어느 해 무더운 여름 아시는 분 초상이 났다. 상가 조문 하고 같이 들어오는데 남편을 향해 “아까운 새끼”! 복 더위에 얼마나 덥냐 하시고,  벌써 큰 방에 베개랑, 고실고실한 삼베 홑이불과 함께 선풍기를 틀어놓다. 시골집이라 가끔 파리도 날아다니 미리 모기장도 쳐 놓다.  같이 다녀온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고 아들만  생각하는 것 같아 내심 서운했다.

사랑이 많으셔서 손주, 손녀들이 낮잠 자도 부채를 손에 쥐고 잠든 손주들에게 항상 가벼운 부채바람을 부쳐주셨다. 아들보다 며느리를 생각해 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아들 먼저 생각하면 당연하게 이해하면 될 데 너그럽지 못한 며느리인지라 크고 작은 일에  섭섭했다.  

형님들이랑 시어머니 흉을 보면 웃으셨다.

그러면서  동서 흉은 서로 보면 안 돼도 며느리들끼리  시어머니 흉을 봐도 된다 하시 옆집으로 마실 가셨다. 참 마음도 넓으시고 사고가 트이신 분이셨다.


올해 추석은 어느 때보다 빨리 돌아왔다. 추석 전날 며느리가 일찍 와서 전도 부치고 허드렛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부산 사시는 오빠랑 올케 언니가  프랑스 위그노 기념일 참석차 출국하셨다가 추석 전날 도착하셨다.

젊은 시절 신세를 많이 졌던 오빠, 올케 언니에게 그동안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음식 장만해 놓는 추석 전 날 우리 집에 오셔서 하룻밤 묵고 가시니 대접해 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아들, 며느리 가까운 자기 집에서 자고 다시 왔다.

어제 음식 장만하느라 힘들었을 건데 아침에  일찍 와서 힘들지? 했더니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오빠는 원래 아침형이 아니라서요

나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들에게 아버지 방에 가서 좀 더 자거라 하며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아들이 엄마! 괜찮아요 연진이랑 같이 상차림 도울게요 하며 식당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그 아버지 그 아들이었다.


분주하게 식사 끝내고  오빠랑 올케언니는 10시 기차 타시기 위해 떠나셨다.

설거지 마고 가정예배 드리고 난 후 아들 내외는  친정 원주로 떠났다.

집이 조용해지자 그때서야 아침 일이 생각났다. 앗차! 하는 생각에 며느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옛날 시어머님께서 아들만 생각한다고  속상했는데 나도 똑같더라 너는 상차림 하는데 아들방에 가서 좀 더 자라고 했던 것 생각하니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시에미구나.

 요즘 너도 연극 연습하느라 힘들었을 건데 수고 많았다 하고 카톡 보냈다.

그랬더니 며느리에게  답장이 왔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북적북적하고 아가씨와 어머니랑  이야기 나누며 함께 전 부친 것도 좋았습니다. 특히  부산 외삼촌, 외숙모님과 모처럼 함께 식사하는 것도 좋았니다.

추석 전 날 밑에 층에 사시는 이모님 가족들과 부산 외삼촌이랑 윷놀이도 재미있었습니다. 여자 편이 이긴 것도 추억으로 남아서  좋았습니다 하고 답장이 왔다.

시골에서 할머님 중심으로 대가족으로 살아왔던 며느리 어른들과 관계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부모님과 형제, 고모님들이 자주 왕래하며 살았던 며느리는 안 일과  정리정돈도 잘했다.

올해도 며느리 친정에서는 배추 400 포기 정도 심었다고 한다.  직접 뽑아서 다듬고  소금간 하고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김장할 계획이다. 요즘 세상에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인데 올해 서른여섯 살 된 며느리가 해년마다 했던 일이라고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일 잘하는 며느리가 들어와서 나는 복이 터졌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옛날에는 결혼하면 시댁 가풍을 배우기 위해 3년 정도 시집식구들과 같이 지냈다.

우리 부부는 시댁 가풍을 배운다는 것은 허울 좋은 소리였다.

사실 남편이 하는 사업이 망해서 시집에 들어서 살게 되었다. 피해의식과 자기 연민으로 시어머님과 형님이 잘해주셔도  밴댕이 속이 되어서  자주 상처받았다.  "시어머니가 되고 보니" 나는 시어머니처럼 사랑이 넉넉하지도 않다.

며느리처럼 눈치껏  일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없고 눈치 없는  며느리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주시느라 때로는  이 많이 상하셨을 것이다.

'시어머니 되고 보니 ' 어머니의 마음이 이제야 헤아리게 된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모기장 # 형님 #김장#윷놀이#자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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