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듯 없는 듯한 것과 확실히 있고 확실히 없는 것
오랜만에 글을 연재해보기로 마음을 먹어보았다. 철학 및 사상사를 공부하며 때때로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들은, 체계화 되어 있지 않으면 잠깐 생각하고 흘러 보내기 마련이다. 논문을 쓸 정도로 구체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시간이 드는데, 이미 쓰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하여 새로운 생각을 기록하지 않은 채로 잊어버리는 것은 또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단상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발행할 글들을 엮는 제목이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하여 고민해 보았다. 이름에 '철학'을 포함하기에는 충분히 치밀하지 못한 사고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고(思考)' 혹은 '사유(思惟)'라고 분류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런데 사고가 사유보다 무거운 것으로 느껴지므로 사유를 선택하기로 한다. 또, 한 시기나 갈래(e.g., 고대 헬라스 사상, 선진 철학 등)만을 집중적으로 탐구할 것도 아니다. 즉, 잡다한 것을 다루고 싶다. 그러므로 '잡(雜)'을 채택한다. 더불어, 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이론을 정립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논(論)'을 쓰기보다는 '설(說)'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여 "사유잡설(思惟雜說)"로 이름 짓는다.
연구를 깊이 있게 진행하려면, 대략적으로 보이는 유사성에 매몰되어 방대한 폭을 자의적으로 좁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시대나 지역을 넘나드는 것이 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큰 도움이 된다. 예컨대 서로 알 턱이 없었을 노자와 파르메니데스를 비교하는 것은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사한 개념에 관해 어떻게 다른 설을 주장하였는지 알아보는 것은, 나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여기 이 글 묶음에 실릴 글들은 바로 그런 글들이다. 얼토당토않은 비교를 통해 이해를 돕는 것. 그 시작을 노자와 파르메니데스의 무와 유, 혹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글로 삼고자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의 헬라스 철학자로서, 종종 '형이상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며, 헤라클레이토스와 비교/대비되며 언급된다. 흔히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 유전설을 주장함 즉, '모든 것은 변한다'고 말한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깊이 있게 다가가자면 이와 관련해서는 첨예한 논의가 있다. 나는 여기에 관해 무지한데, 이 글은 그에 관해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선 넘어가도록 한다.
그가 작성한 글은 그리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철학 운문인 <자연에 관하여>가 있으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속 묘사, 플라톤의 대화편인 <파르메니데스>에서의 말이 있을 따름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글인 <자연에 관하여>만을 살핀다.
<자연에 관하여>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여신의 입을 빌려 자신의 주장을 설파한다. 이 글의 주된 사유는 존재와 비존재 간 대립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우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비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진리의 길이다. 한편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탐구할 수 없고 비진리의 길이다. 즉, 오직 '존재(Being)'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고, '비존재(Nonbeing)'는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본래 존재하고, 언제나 존재하였으며, 언제나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존재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전부 존재하거나 전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한 길만이 있으니,
그것은 곧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표지가 있으니,
존재하는 것은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으며,
오직 하나이고, 완전하며, 움직이지 않고, 끝이 없다.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온전히 하나로서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생겨났다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만약 무(無)에서 생겨났다면,
무엇이 그것을 더 늦게 혹은 더 일찍 생겨나게 했겠는가?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전적으로 존재하거나, 전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파르메니데스, <자연에 관하여> 中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확실히 구분한다. 더불어, 그는 필멸자(인간)들이 빛-어둠, 두꺼움-얇음, 가벼움-무거움 등에도 가치를 매겼음을 말한다.
필멸자들(Mortals)은 두 가지 형상을 말하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중 하나는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고,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은 진리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각각에 대립되는 실체와 서로 구별되는 특징을 부여했다.
(...)
하나에게는 하늘의 불, 즉 빛나고, 가볍고, 모든 방향에서 자기 자신과 같은(동질적인) 성질을 할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것과는 같지 않다.
다른 하나는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어두운 밤, 즉 조밀하고 무거운 실체이다.
파르메니데스, <자연에 관하여> 中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어둠은 빛의 부재, 차가움은 따뜻함의 부재와 같이,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의 결핍이나 부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의 궁극적인 철학적 입장은, 오직 '존재(Being)'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고, '비존재(Nonbeing)'는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반대 개념들(빛과 어둠, 삶과 죽음 등)은 진정한 실재가 아니라, 단지 인간의 의견이나 착각(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파르메니데스는 반대되는 것들을 긍정적/부정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직 긍정적인 것(존재)만이 실제로 존재하며, 부정적인 것(비존재)은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었고, 전자에 긍정적인 가치를 후자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존재와 비존재를, 두 개념을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이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밀란 쿤데라의 의문이다.
쿤데라는 그의 대표 저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 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선명한 것, 뜨거운 것, 가는 것, 존재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밀란 쿤데라(2018), 이재룡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울: 민음사: 13쪽.
어떤 것이 존재에 해당하고 어떤 것이 비존재에 해당하는가? 다른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옳다고 치더라도, 가벼움과 무거움 중 어떤 것이 긍정적이며 어떤 것이 부정적인가? 물론 이와 같은 질문은 파르메니데스의 주된 요지에서 다소 벗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시사적인 의문 제기이다.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움이 긍정적이고 무거움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였지만, 쿤데라가 보기에 그것은 쉽게 갈라둘 수 없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제목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가벼운 삶'과 역사의 무거움을 살아가는 '무거운 삶' 간의 고민을 다룬다. 그런데 어떤 것이 더 좋은 삶인지 알기는 힘들다. 왜 그러한가?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밀란 쿤데라(2018), 이재룡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울: 민음사: 17쪽.
무거운 삶이 더 좋을지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삶을 맞닥뜨릴 뿐이고, 그 결과가 어떨지는 그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가벼움과 무거움이 쉽게 구분되지도 않을 뿐더러, 구분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에 가치를 둘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쿤데라의 의문에 대한 답변이 될 만한 것은, (만약 실존 인물이었다면) 파르메니데스와 동시대를 살았을 가능성이 높은 노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노자 역시 이 세계를 무(無; non-being)와 유(有; being)로 나누어 본다. 다만 파르메니데스와 다른 것은, 노자에게는 유도 있고, 무도 있다. 이는 <도덕경> 1장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킨다.
유는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無, 名天地之始;有, 名萬物之母.]
<도덕경> 1장
그런데 이 무와 유는 상생, 즉 서로 살게 해준다.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뤄주며, 긺과 짧음은 서로 비교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것이 세계의 항상 그러한 모습이다.
[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較,高下相傾,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도덕경> 2장
한편 노자는 무와 유, 이 둘이 서로 살게 하는 것을 수레바퀴, 그릇, 방 등이 기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 비유한다.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곡에 모이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수레의 기능이 있게 된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그의 기능이 있게 된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방의 기능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유는 이로움을 내주고, 무는 기능을 하게 한다.
[三十輻,共一轂,當其無,有車之用。埏埴以為器,當其無,有器之用。鑿戶牖以為室,當其無,有室之用。故有之以為利,無之以為用。]
<도덕경> 11장
수레 바퀴가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큇살이 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빈 공간도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 그릇은 흙으로 만들긴 하지만, 그 안에 빈 공간이 없으면 그릇으로 쓸 수 없다. 방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유는 이로움을 내주고, 무는 기능을 하게 한다."고 말한다. 유와 무는 상생하는 것이다.
즉, 먼저 노자에게 무는 '유의 부재'로 설명할 수 없다. 유는 유이고 무는 무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상생한다. 이들이 상생하는 모습은, 새끼줄이 두 가닥으로 꼬여 있는 것으로 비유된다.
새끼줄처럼 두 가닥으로 꼬여 있어 개념화할 수가 없다. [繩繩不可名]
<도덕경> 14장
정리하자면, 유가 무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며, 무 역시도 유의 원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둘의 관계는 인과론적이거나 위계적인 세계관에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둘은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존재론적 측면에서 서로에게 근거가 된다. 김형효 선생님께서 현대 서양철학의 용어를 사용하여 잘 지적해 두었듯, "무는 유의 탈근거이지 원인이 아니다." (김형효, <사유하는 도덕경>, 2004, 서울: 소나무. 324쪽.)
나아가 한 가지 더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이러한 무와 유는 노자에게 있어서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노자가 '황(恍)'과 '홀(惚)'을 사용해서 유와 무를 설명하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큰 덕의 모습이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정말로 황하고도 홀하다.
홀하고 황하구나! 그 안에 형상이 있다.
황하고 홀하구나! 그 안에 사물이 있다.
[孔德之容,唯道是從。道之為物,唯恍唯惚。忽兮恍兮,其中有象;恍兮忽兮,其中有物。]
<도덕경> 21장
황은 무엇이고 홀은 무엇인가? 중국 송대의 노자 주석가인 여혜경(呂惠卿, 자는 길보吉甫)은 황은 곧 어둡지 않음[恍則不昧]이고, 홀은 곧 밝지 않음[惚則不激]라고 말한다. 즉, 황은 곧 유의 계통에 있고, 홀은 곧 무의 계통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황이라고 하여 확실히 "'유'이니라(有也)."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홀이라고 하여 확실히 "'무'이니라(無也)."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김형효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보자.
당나라의 노자 주석가인 이약李約은 이 '황恍'과 · 홀惚'을 구분함에서 '황'을 유有계열과, '홀'을 무無계열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황은 유의 계열이지만 100% 유라고 말하기도 힘들고, 홀이 무의 계열이지만 100% 무라고 언명하기도 힘든 애매한 중간지대를 뜻한다고 이약은 부언했다. 유무가 서로 새끼꼬기를 하듯이 상호 교직의 텍스트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그런 교직성의 상징을 가르쳐주기라도 하듯이, 한 번씩 '황恍'과 '홀惚'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 먼저, '황혜홀혜怳兮惚兮'로 쓰고, 다시 '홀혜황혜惚兮怳 兮'로 씀으로써 앞뒤를 바꿔치기 했다. 이것은 장난삼아 한 일이 아니 도道의 교직성交織性(la textualité)을 알려주는 신호로 읽어야 할 것이다.
유무가 그렇게 상호 교직하여 직물짜기를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무라고 해도 100%무라고 보기 힘들고, 유라고 해도 그것이 100% 존재자처럼 무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김형효, <사유하는 도덕경>, 2004, 서울: 소나무. 207쪽.)
즉, 애초에 '유'라고 해서 100%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무'라고 해서 100% 비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자의 세계관에서는 존재와 비존재를 그렇게 분명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와 무는 황하고 홀하기 때문에, 있는 듯 하지만 있기만 한 것은 아니고, 없는 듯하지만 없기만 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가벼움과 무거움을 나누고자 했던 쿤데라의 질문의 전제 자체가 달라진다. 무거움은, 무거운 듯하지만 가볍기도 한 것이다. 가벼움은, 가벼운 듯하지만 무겁기도 한 것이다.
*글에 첨부된 이미지는 모두 Chat GPT 이미지 생성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자연에 관하여> 한국어 번역은 작성자가 영문판을 옮긴 것입니다.
*<도덕경>의 한국어 번역은 최진석 선생님의 <노자의 목소리로 읽는 도덕경>을 참고하였고, 필요한 경우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