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둘째 날>
이튿날은 제주도의 동쪽 해안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비자림에 들러 숲 해설을 들으며 비자 향이 가득한 숲길을 산책했다.
숲은 수백 년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스스로 이리저리 뻗쳐나가는 모양 그대로 꺾이면 꺾인 대로 썩으면 썩는 대로, 원시림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그곳에는 방문객들이 잠시나마 숲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숲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상상하며 걸을 수 있도록 산책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행이 끝난 지금 다시 한번 사진첩을 뒤적여보니, 청록빛 비자나무 사이에 찍힌 우리 사진이 싱그럽기만 하다.
그러나 한여름의 숲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나무의 깊은 그림자라 할지라도, 태양이 타오르며 늠름한 모양새로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아가며 뿜는 열기를 더 이상 완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더위 말고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우리는 숲해설가님의 권유로 산책로 중간지점 즈음부터 호기롭게 맨발 걷기를 시작했다.
처음 맨발로 붉은 화산토 땅을 디뎠을 때, 습기를 머금어 촉촉하고 부드러운 땅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었다.
이따금 아직 자신의 생김새를 고집하며 부드러운 흙이 되지 못한 동그란 화산토 덩어리들이 발바닥을 자극했지만 참을 만했다.
이윽고 비자림 돌멩이 길이 나타나면서 본격적인 고난이 시작되었다.
발바닥 지압이 건강에도 좋으려니 싶어 과감히 돌멩이 길에 발을 내던졌지만, 발바닥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찌릿찌릿한 통증은 당장이라도 신발을 다시 신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통증보다 붉게 물든 발이 신발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이 더 싫었기에, 여행의 동반자 중 가장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행은 이까짓 거 끝까지 해보자며 돌멩이를 계속 밟아 나갔다.
고요한 숲 속에서 도란도란 말소리보다 자갈과 사투하는 우리의 앓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우리는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평범한 삶의 진리를 깨달았다.
힘든 돌멩이길을 지나며 중간중간 나타나는 화산토가 발의 통증을 잠시나마 잊게 할 때, 그 보드라운 흙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또 더위와 싸우다가 숲 냄새를 품은 시원한 바람을 만났을 때, 그 상쾌함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마침내 끝까지 맨발 체험을 완주하고 시원한 물에 팔다리를 씻어낼 때와 갈증과 더위에 지친 몸을 식혀주던 차가운 커피와 한라봉 슬러시를 마실 때, 그 시원함이 얼마나 반갑던지.
우리는 덥고 힘들다고 짜증을 내기보다 그 상황에서도 평범한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며, 마음가짐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행복을 눈앞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돌멩이 길이었지만 결국은 끝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땀으로 속옷까지 다 젖을 정도로 힘들어 죽을 것 같던 순간에 만난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음료수는 ‘지금 이 순간이 천국 같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했으니,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은 결국 내 마음가짐이 만드는 것이며,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몸을 움직였으니 배를 채울 시간이었다.
우리는 비자림에서 가까운 구좌읍의 한 수제버거집으로 향했다.
그 식당은 힙한 외관, 멋진 풍광은 가졌으나 에어컨이 없었다.
내내 더위와 싸우다 온 우리는 에어컨이 없는 곳에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선풍기 바람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제주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더위는 금세 식힐 수 있었다.
또 깜짝 선물처럼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와 저 멀리 보이는 우도와 성산일출봉의 경치는 에어컨이 없어도 이곳이 충분히 멋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배를 어느 정도 채운 후 가게 앞으로 쭉 뻗은 해안 길을 따라 바다와 맞닿은 곳까지 걸어가 보았다.
쨍한 하늘과 검은 돌 위에 잔디처럼 푸릇푸릇 남겨진 해초 더미들, 그리고 하늘만큼이나 파랗고 잔잔한 바다, 바다를 향해 쭉 뻗은 길, 그 길 위에 우리가 서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건 오직 검은 돌멩이를 잔잔히 쳐내는 물결 소리와 두런두런 속삭이는 우리들의 목소리 뿐이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카메라의 촬영 버튼을 누르며 이곳을 담기 시작했다.
에어컨이 없다고 실망하고 차를 돌려 나왔다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선선함을 몰랐을 테고, 멋진 이곳을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이번 여행은 남들이 다 보는 관광명소의 풍경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 어떤 명소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 이 바다가 이제껏 본 그 어느 바다보다 아름다웠다.
오후에는 이왕 제주도의 동쪽으로 왔으니 종달리에 있는 독립책방 중 한 곳인 ‘소심한 책방’이란 곳을 들러보았다.
전날 들렸던 소리소문 책방에서 본 책도 있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책들도 많았다.
독립책방을 구경하는 재미 중 하나는 책방 주인이 Pick 해둔 책과 주인이 남겨둔 메모를 읽는 것, 그리고 다른 책방에서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책을 만나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출판물을 접할 수 있었다.
사실 나같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책을 살 때는 고민이 많다.
세상에는 독특하고 재밌는 소재의 에세이도 많이 있지만 지갑을 열게 하는 건 보통 오랫동안 꾸준히 좋은 책이라고 불리는 고전이나 스테디셀러, 혹은 인지도가 있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일 때가 많다.
독립책방 구경을 좋아하지만, 막상 독립출판물을 내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재미만 보고 혹해서 샀다가 생각보다 힘 빠지는 내용이거나, 그럴싸해 보이는 소개 글과 목차를 보고 샀지만, 작가의 필력이 기대에 못 미칠까 두려워서이다.
이제는 글을 쓰는 처지가 되었기에 누군가의 필력을 감히 논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작가가 피로 써낸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여전히 독자로서는 같은 돈을 주고 책을 살 때 이왕이면 버릴 것 없는 문장들로 가득한 책을 소장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또 한편으로 나의 취향을 정확히 저격하는 독립 출판 서적을 제대로 고를 자신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이날은 용기를 내었다.
책방 한쪽에 포장지에 감싸인 채 오직 책방 주인의 메모만이 책의 내용을 추측하게 하는 블라인드 북 코너로 향했다.
블라인드 북은 이름 그대로 봉투 속에 꼭꼭 숨겨진 책으로 그 속에 무슨 책이 들어있을지 모르는 랜덤 뽑기와 같다. 내게 주어진 정보는 책의 분야와 특징, 추천하고 싶은 사람, 가격, 그리고 책방 주인의 소감뿐이며 소개 글을 보고 끌리는 책을 고르면 되었다.
나는 전시된 블라인드 북 중 책방지기가 ‘좋다’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자신의 ‘올해의 인생 책’이라 말하고 싶다는 에세이를 한 권 골랐다.
누군가의 인생 책으로 선정될 정도니까 내 취향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 괜찮을 거라는 마음에서였다.
책을 계산하고 책방 도장을 찍기 위해 봉투를 뜯어보니 ‘일인칭 가난’이라는 낯선 제목의 책이었다.
독립출판물이다 보니 책의 겉모양은 대형 출판사 서적들에 비해 초라한 첫인상인지라 실망감을 살짝 감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후 여행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이 책의 진가를 보게 되었으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라인드 북 선택은 성공이었다.
종달리는 수국이 유명하다는 여행 후기를 본 적있다. 내가 방문한 8월에는 6월에 피었던 수국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아기자기한 수국길을 따라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는데, 꼭 수국이 아니라도 돌담이 가지런히 놓인 제주의 시골길은 여행객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하지만 8월의 날씨는 여행객들의 소박한 산책마저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제주도는 모든 계절마다 볼거리가 있고 매번 다른 아름다움을 준비하고 있으니 제주에 일 년간 머물며 사계절을 오롯이 모두 느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직은 한창 크는 아이를 기르고 있고, 교사라는 직업 특성상 어딜 가든 남들도 다 모이는 성수기에 여행을 다녀야 하는 신세다 보니 호젓하게 제주에서 일 년 살기를 해보려면 먼 훗날 은퇴를 해야 가능하지 싶다.
여행의 둘째 날은 모든 순간이 다 좋았으나 하이라이트는 역시 물놀이였다.
나는 워낙 자외선에 취약한 체질이라 여름 바닷가를 극도로 싫어한다.
여름 바닷가에서 놀고 난 다음에는 피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그레 뒤집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외선이 강한 해외 휴양지를 두려워한다.
사실 이번 여행 출발 전에도 수영복을 담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내가 워낙 해수욕을 싫어하니 물놀이를 함께 하지 못해 서운해할 아이들도 걱정이었다.
여유 공간을 내줄 수 없는 꽉 찬 캐리어와 몇 년간 입지 않아 맞지 않은 수영복 덕분에 물놀이를 생각하지 않고 제주도에 왔다.
그러나 오전부터 찌는 더위를 마주하니 물놀이 생각이 저절로 간절해졌다.
나만 수영복이 없었지만 대충 티셔츠라도 걸치고 물에 뛰어들자 마음먹고 목적지를 정했다.
우리는 제주 동쪽에서는 보기 드문 에메랄드빛 해변이 아름다운 김녕해수욕장을 뒤로한 채 '삼양 물통'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갔다.
이곳은 용천수가 바다와 만난다는 곳으로 제주 현지 도민들이 관광객들을 피해 물놀이하는 유명한 곳이었다.
고등학교 한국 지리 시간에 배운 내용을 상기시켜 보면,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 제주도는 화산지형이다.
특히 제주도는 비가 오면 물이 지하로 쭉 빠지는데 이 물이 지층을 타고 흐르다가 해안가에 솟아오른다.
이것을 용천수라 하고 우리가 아는 삼다수가 바로 이 물을 뽑아 만든 것이다.
우리 발아래 조금만 깊이 파고 내려가면 있을 지하 깊은 곳,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이 차가운 그 물이 제주도의 생명수이다.
이론으론 익히 알았지만, 용천수가 솟아오르며 지하에서부터 가득 품은 냉기를 뿜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용천수가 솟는 곳 가장 가까이 자리를 잡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차오르는 물을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뜨거운 대지에 서 있는 우리의 더위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
시원함을 넘어 몇 초만 지나도 통증이 느껴질 정도의 차가움인데도 거기 몰린 사람들은 진 빠지는 더위보다 정신이 퍼뜩 드는 차가움이 더 낫다는 양 물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이번 여름 역대급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역대급 차가움이 필요했나 보다. 더위를 피해서 시원한 곳으로 옮긴다는 피서(避暑)보다 더위와 싸우고 있는 투서(鬪暑) 객들이 여기 있었다.
짠 내 가득한 후덥지근한 바닷물보다 삼양 물통에서의 물놀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피부 속에 깊게 스며든 용천수의 냉기는 물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 하여금 여름에는 역시 물놀이를 해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했다.
나의 삶. 나의 일상. 나의 에세이. 여름방학 여행기 2. 제주 편 <여행의 둘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