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셋째 날>
제주에 온 지 삼 일째, 이날은 저녁부터 새로운 일행이 두 명 더 함께할 예정이었다. 이 십년지기 대학 동기들인데 다들 바쁜 와중에 일정을 맞추어 제주에서 함께 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전공과 직업이 달라지고, 사는 곳이 달라지고 시간이 흐르며 연락이 뜸해졌지만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났던 이 친구들은 여전히 각별하고 많은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
간호사로, 여자로, 엄마로, 어른으로 함께 살아온 이십 년의 세월은 앞의 이십 년 보다 삶의 농도가 훨씬 진했던 시간이었다. 세상에 처음 나가 돈을 벌며 일했던 힘겨움, 모두가 영화로 만들어 모으면 수십 편은 될법한 눈물과 아련함 가득한 각자의 연애사,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엄마가 되고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삶의 방식, 흐르는 세월과 각자의 삶을 공유하는 동안 우리의 관계는 싱그럽던 이십 대보다 훨씬 더 단단해졌다. 이 친구들과는 저녁에 서귀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우리는 그때까지 서귀포로 천천히 향하기로 했다.
첫 목적지는 녹차밭이 아름다운 오설록이었다. 대학 시절 녹차 아이스크림을 처음 맛봤을 때 텁텁하고 쓴 차가 이렇게 달콤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오설록이니 나뚜루니 배스킨라빈스니 하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은 비싸서 잘 가지도 않았지만, 가게 되면 꼭 녹차 맛 아이스크림을 골랐었다. 그때는 돈을 벌지 않았으니 비싼 아이스크림을 매번 먹을 순 없었다. 내가 찾은 대안은 500원짜리 녹차마루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깊고 진한 녹차 맛을 떠올리는 것이었고, 운이 좋다면 엄마와 함께 드라이브하며 가까운 보성에 들러 녹차 아이스크림을 얻어먹는 것이었다.
이제는 제주도 오설록 앞에 펼쳐진 초록빛 녹차밭은 우리가 무수히 봐왔던 여느 녹차밭과 다를 것이 별로 없었고,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녹차 아이스크림 맛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친구와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이곳을 많이 찾아왔다. 무슨 음식이든 본점이나 본고장에 가서 먹어야 제맛인 것처럼 한국 최초의 차(茶) 박물관이 세워진 오설록에 와서 마시는 녹차가 다른 곳에서 마시는 것보다 더욱 특별하고 풍미가 더 좋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나였다면 당연히 우유를 섞어 만든 녹차라테나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아침부터 차가운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잘 나던 나는 점장님 추천메뉴인 ‘따뜻한 화산암 차와 말차 파베샌드’를 선택했다. 어딜 가든지 추천메뉴는 후회가 없다. 말차가 농축되어 쫀득하고 달콤한 파베샌드와 발효차 특유의 고소한 향이 나면서도 뒷맛이 깔끔한 차가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맛이었다. 이번 여행을 다녀온 후, 남편과 국립현대미술관 뒤편에 자리 잡은 오설록에 들른 적이 있다. 처음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처럼 강력한 여운이 길게 남은 녹차 파베샌드를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메뉴는 제주에만 있는 메뉴였는지 이 매장에서는 파베샌드를 만날 수 없었다.
젊은 시절 500원짜리 녹차마루 아이스크림으로 진한 녹차 아이스크림을 그리워했듯 이제는 무엇으로 이 진한 말차 파베샌드를 그리워해야 할까 싶었다. 다행인 것은 지금은 이십 년 전과 달리 저녁에 클릭 한 번 이면 새벽 배송으로 말차파베샌드를 받을 수 있다. 여행지에서의 맛에 대한 기억은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곱씹으며 추억할 대상으로 두고 이따금 비슷한 것을 만났을 때 반가워하며 특별했던 그 맛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지금처럼 언제든 원하면 똑같은 것을 바로 사 먹을 수 있다면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을 추억할 방법이 하나 사라지는 건 아닌지 내심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행을 간다면 현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꼭 먹어봐야 한다. 그때의 그 식당, 그 거리, 그 배경과 날씨에 완벽하게 어울렸던 그 맛은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절대로 똑같이 찾을 수가 없다.
이후 서귀포에 있는 사계 해안을 방문했다. 으레 제주도의 해안가는 검은 현무암이 있어야 하지만 사계 해안은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모래가 쌓여 돌처럼 단단해진 후 풍화작용을 거치며 파인 곳곳의 구멍들이 가득했다. 이국적이다 못해 마치 외계행성의 메마르고 거친 표면과 같은 이질감을 준다. 그 파인 구멍 속에 앉아 사진을 찍는 모양새가 마치 두더지가 구멍 위로 얼굴을 내민 것 같았으니, SNS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여기저기 그럴싸한 구멍마다 젊은 여자들이 자리 잡고 땡볕 아래서 오랫동안 구멍 위로 얼굴을 내밀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의 우스운 자태들은 뒤로 하고, 그저 친구와 나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속에서나 나올법한 척박한 외톨이 행성의 지킴이처럼 쓸쓸한 자세를 잡으며 고독한 사진을 찍고 왔다. 사실 그 비경은 간조 때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물때를 맞춰 방문해야 했는데, 우리는 아무런 정보 없이 갔음에도 비경을 조우했으니 운이 무척 좋았었다.
간단히 태국식 점심을 마치고 친구들이 서귀포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며 ‘액트몬’이란 곳을 갔다. 이곳은 종합 오락실 같은 곳이었다. 전날 미리 티켓을 구매했고, 방 탈출게임처럼 퀴즈를 풀며 금화를 얻는 해적 보물 찾기와 레이저 사격, 1시간 오락실 자유이용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재밌었던 것은 레이저 서바이벌 사격이었다. 레이저로 조준하여 상대방의 머리와 가슴을 6발 이상 정확히 맞추면 상대는 죽는다. 죽은 사람은 7초간 총을 쏠 수 없다. 컨테이너와 드럼통으로 몸을 은폐, 엄폐하며 정확한 사격 솜씨로 적을 쏴야 한다. 몸을 숨길 수 없을 땐 상대의 총구가 나를 향하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쏜살같이 몸을 움직여야 한다. 앞의 적만 보지 말고 나의 뒤통수를 노리는 적까지 살펴야 한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적에게 접근하여 정확하게 조준하여 상대를 쏜다. 그러면 나는 최고의 저격수가 될 수 있다. 머리로는 이렇게 최고의 저격수가 된 모습을 상상하며 우리의 무대로 향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나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아이들 둘을 따돌리고 뒤에서 세 번째로 순위를 마감했다. 전설의 총잡이는 그렇게 탄생하지 못했고, 전쟁터에서 일행에게 내 뒤통수를 여러 번 내준 후에야 총과 헤드 센서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비록 사격에는 솜씨가 없었지만,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한동안 흥분과 호흡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에너지를 한껏 쏟아내고 나니 어느덧 친구들이 서귀포의 숙소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와있었다. 새로운 일행과 함께하는 나머지 일정은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셋째 날 해는 아직 지평선을 넘어가지 않았지만, 하루가 무척 길어질 것이 예상되었다. 총 다섯 명 중 한 명이 빠진 불완전체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넷이 함께할 여정에 설레기 시작했다.
나의 삶. 나의 일상. 나의 에세이. 여름방학 여행기 3. 제주 편 <여행의 셋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