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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늘 Aug 21. 2024

여름 방학 여행기 4. 제주 편

<여행의 셋째 날 밤과 넷째 날>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서귀포지역에서의 숙소는 중문관광단지 가까이에 있는 친구 엄마의 제주도 집이었다. 운 좋게도 우리의 일정 중에는 제주도 집을 비우시고 본가로 돌아가신 친구 부모님 덕에 그 집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제주도의 농가 주택방문은 처음이었다. 대문 없는 검은 돌담이 집 주변을 두르고 있었고 마당 한쪽에는 텃밭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텃밭 너머로는 감귤나무 30그루가 아담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집은 간단한 세간살이와 방 한 칸, 거실 겸 부엌 한 칸으로 부부가 살기 딱 알맞은 크기였고, 천장은 웬만한 도시의 집들보다는 훨씬 낮은 높이였다. 그곳에 이십년지기 네 명이 모였다.     


예상대로 그날 밤은 무척 길었다. 17세기 스페인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친구를 갖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고, 처한 상황과 각자의 삶이 지향하는 바도 조금씩은 다 다르다. 삶의 배경이 다른 만큼 서로의 성격, 취향, 말투, 태도 또한 다른데, 어떻게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우리가 만나, 이 넓은 세상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인연을 맺고 함께 존재할 수 있게 된 걸까? 어떤 행운이 작용하여 친구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멋진 인생을 응원하며 옆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그날 밤, 그 시간, 그곳에 모여 앉아 위로를 주고받고 서로를 격려하며 눈물을 흘리고, 웃고, 큰 소리로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라 행복했다. 인생의 찌질했던 순간, 찬란했던 순간, 위로가 필요했던 순간에 함께 했고, 아무리 친구라도 말하지 못할 사연에 벅찼을 때는 그저 그 자리에 있어 주었다. 아직도 말 못 한 사연이 있더라도 괜찮았다. 또 시간이 흘러 각자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어 가면 들어줄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 그런 친구들과 밤새 이제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더 클리프에서 본 바다


그렇게 긴 밤을 보내고 넷째 날 일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행의 동무가 늘어나니 여행 코스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먼저 여행을 시작했던 둘은 이미 더위에 걸어본 경험이 있었고, 걸을 땐 힘들어도 즐거웠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함께한 친구들은 이 더위에 아직 걸어보지 않았으니, 과연 땡볕 아래 관광지를 잘 걸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날씨뿐 아니라 제주의 숙소로 돌아가는 동선도 고려해야 했다. 식물원을 갈지, 중문관광단지를 돌아야 할지, 해변을 가야 할지, 숲길을 걸을지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숙소에 버티며 아무것도 이야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 부지런히 숙소를 정리하고 길을 떠났다.


오전은 서귀포 앞바다의 경치가 끝내주는 카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밤새 이어진 긴 대화로 떨어진 체력을 다시 끌어올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곳의 멋진 경치는 자동으로 카메라 버튼을 켜게 했다. 요즘에는 멋진 것, 맛있는 것을 보면 핸드폰을 꺼내 인증사진을 찍는다. 노골적으로 피부의 기미, 주름 하나하나가 다 보이는 내 얼굴 사진을 보는 것이 싫어지고, 혹시라도 사진 보정을 하더라도 어딘가 어색한 사진이 전혀 나 같지 않다. 그래서 사진을 찍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뒷모습만 찍거나, 나를 찍지 않는 것이 더 편해졌다. 그래서일까? 갈수록 핸드폰 갤러리에는 내 사진보다 내 주변의 것들, 내가 방문한 장소나 먹었던 음식, 읽은 책, 내가 조그맣게 나오거나 없는 가족사진이 채워지고 있다. 이번 여행지는 워낙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아서 종종 용기를 내 얼굴을 들이밀어 보았다. 끝내주는 하늘과 경치 덕분에 친구와 웃으면서 “야, 안돼”라든지 “건질 사진이 없다.”라고 하면서도 “나 좀 찍어줘”라며 쉴 새 없이 포즈를 취할 수 있었다.      

중문  더 클리프

사진찍기는 그다음 목적지에서도 계속되었다. 동화 속 신비로움을 품고 있던 ‘산양큰엉곳’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숲길은 아예 대놓고 여기서 사진을 꼭 찍으라는 듯 다양한 포토존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아이들이 엄마 친구들만 없으면 실컷 물놀이했을 텐데 또 숲길을 걷느라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한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헨젤과 그레텔처럼 숲속 모험을 하는 컨셉으로 사진을 찍어 영상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의 엄마가 마녀 역할을 하고 아이들은 숲속을 탐험하며 마녀를 따돌리는 줄거리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사진찍기에 몰입했고, 무척 더운 날임에도 아이들은 지치지 않고 잘 따라와 주었다. 숲 자체를 감상하는 것보다 포토존을 따라 이야기를 만드는 재미가 더 쏠쏠했다.    

산양큰엉곶 포토존 기찻길

  


전날 밤은 114년 한반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밤으로 기록되었고, 다음 날이 되어도 더위는 꺾이지 않은 상태였다. 이 더운 날 사진을 찍겠다고 숲길을 걸으니 내 몸에 존재하는 모든 땀구멍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발바닥까지도 땀에 푹 젖어, 신고 간 슬리퍼가 땀으로 첨벙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고 일행들의 체력은 점점 고갈되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는 이틀 전 방문했던 삼양 물통 생각만 계속 떠올랐다. 그 물에 발을 담갔으면. 그 물에 가슴까지 몸을 담갔으면. 그 물에 이 땀을 씻어냈으면. 그렇지만 그곳을 들르기엔 너무나 애매했다.   

   


결국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 ‘보배책방’이란 독립책방에 들러서야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곳은 23년간 출판업에 종사한 책방지기가 있었고, 다른 두 책방보다 아동·청소년 책이 훨씬 많은 독립책방이었다. 이곳은 공간은 다른 책방들에 비해 크지 않았지만 특이하게 계단이 있는 복층 구조였고 다락과 반지하 공간은 작가들의 북토크가 이루어지는 공간임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책방지기가 개성 있게 큐레이션 해둔 책을 볼 수 있었고, 틈틈이 책을 읽은 후 주인이 남긴 메모가 적혀있어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곳에서 어제 제주에 온 친구가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두 권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클레어 키건의 ‘이토록 사소한 친절’과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권해주었다. 나도 끌리는 책은 있었지만 이미 사둔 책도 다 못 읽고 있기에 이번만큼은 친구가 책을 사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만 보았다.      


보배책방



이날 밤은 친구들과 내가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친정이 있는 광주로 떠나야 했고, 늦게 왔던 친구들은 이틀 더 제주도에 머물 예정이었다. 4일이라는 시간이 금세 지나가 버렸다. 매일 한적한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겠다는 처음 계획과는 달리 더위와 싸우고 수다를 떨며 꽤 바쁘고 알차게 보낸 여행이었다. 나는 다시 여행을 시작할 때처럼 혼자 떠나야 했지만, 처음과 달리 혼자라는 허전함은 더 이상 없었다. 새로운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는 친구들이 보내준 사진을 보며, 나의 몸은 이제 광주에 도착했지만, 마음은 아직도 제주도에 그대로 남기고 온 것처럼 친구들이 계속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친정에서 잠깐의 정비 후 새로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나의 여행기는 남쪽 바다에서 이제 동쪽 바다로 옮겨간다.


제주 탑동야경



나의 삶. 나의 일상. 나의 에세이. 여름방학 여행기 4. 제주 편 <여행의 셋째 날 밤과 넷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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