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h und Du -관계
나-너 좋아해!
나-너 사랑해!
슬그머니 나오면 '나'가 된다
슬그머니 들어가면 '너'가 된다
나-너
들락날락
'너'가 된다
'너' 많이 아프구나!
'나'가 된다
'너'를 꼭 안아준다
나-너
부버는 제 2부 인간의 세계 전반부에서 인간의 역사와 삶이 어떻게 ‘나-너’ 관계에서 멀어지고, 대신 ‘나-그것’의 구조 속으로 고착화되어 왔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그것’의 세계가 팽창해 온 과정이다. 문화가 정체된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인간이 다루는 대상과 정보, 도구의 범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자연에 대한 지식이 늘고 사회가 세분화되면서, 인간은 점점 더 많은 ‘대상’을 경험하고 이용하며 살아왔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것’의 세계와 두 방식으로 관계한다. 관찰과 정보를 쌓는 경험,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을 사용하는 이용이다. 현대가 자랑하는 ‘정신의 진보’란 사실 이 두 기능의 확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부버에게서 정신(Geist)은 이런 기능적 능력이 아니다. 정신은 오직 ‘나와 너 사이’에서 일어나는 응답이다. 정신은 내 안의 재능이 아니라, 내가 온 존재를 다해 누군가에게 응답할 때 생기는 ‘사이 공간’의 힘이다.
부버는 이 관계의 역설도 지적한다. 누군가에게 깊이 응답할수록 우리는 그를 붙잡고 싶어 하고, 그 순간 ‘너’는 다시 ‘그것’으로 굳어버린다. 그럼에도 이런 대상화는 피할 수 없다. 예술·학문·제도 같은 모든 창조물은 결국 ‘너’를 대상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화가 끝이 아니라, 일상의 어떤 순간에 다시 ‘그것’이 깨어나 ‘너’로 현현(顯現)하는 순환 자체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 순환을 거의 잃었다. 사람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만나기보다 분석하거나 편하게 개조하려고만 한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다른 존재의 본질은 ‘너’로 만날 때 드러나지만, 인식 체계 속에 넣는 순간 ‘그것’으로 굳는다. 문제는 인간이 이 ‘그것’ 상태만을 절대 진리처럼 취급할 때 생긴다. 그때 세계는 정복 대상으로 바뀌고, 지식은 정복의 도구가 된다.
예술 또한 동일한 구조를 가진다. 예술가는 어느 순간 현존을 ‘너’로 만난다. 그러나 그것을 작품으로 남기는 순간 형상은 틀 안에 묶인다. 하지만 작품은 죽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 다시 그 형상을 깨워줄 살아 있는 만남을 기다릴 뿐이다. 비평 역시 관계를 위한 준비일 뿐,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이보다 더 높은 행동은 부버가 말하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가르침이란 지식을 전달하는 기교가 아니라, 말과 행위를 통틀어 ‘너’에게 응답하는 삶 전체를 의미한다. 이 가르침은 율법을 완성하기도 하고 넘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살아 있는 가르침을 역사와 텍스트에 가두고 해석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린다. 그 순간 ‘너’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박제된 지식뿐이다.
‘너’를 잃은 사람들에게 남는 세계는 두 개의 관할구역 뿐이다.
하나는 조직·규범·노동 같은 제도, 다른 하나는 개인적 기분과 감정이 있는 내면의 영역이다.
제도는 과거에 굳어버렸고, 감정은 아직 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쪽에서도 살아 있는 삶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공백을 감정으로 메우려 한다. 국가는 차갑고 비인간적이니 사랑 공동체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감정만으로는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다. 공동체는 살아 있는 중심적 ‘너’와의 관계, 그 다음 서로 간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감정은 필요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상대를 ‘너’로 만나는 살아 있는 응답이 결혼을 지탱한다.
부버는 말한다. ‘나-그것’ 관계가 악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세계의 전체가 될 때이다. 그때 ‘그것’의 세계는 비대해져 사람에게서 현실적인 자기를 빼앗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괴물이 된다. 오늘의 경제와 국가는 바로 이런 구조에 놓여 있다. 경제에서는 돈과 노동을 ‘이용’하는 ‘나’, 정치에서는 여론과 흐름을 ‘이용’하는 ‘나’가 지배한다. 이런 ‘공리적 나’가 지배할 때 조직은 점점 더 거대하고 자동화된 기계가 된다. 지도자들 역시 사람을 ‘너’가 아닌 도구로 보아야만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다.
근대의 진보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한다면 문명 자체가 붕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파멸할 것이다. 부버는 욕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권력 의지, 이용 욕구, 충동… 이 모든 것은 ‘너’와 연결되는 순간 건강한 공동체의 힘이 된다. 그러나 ‘너’와 단절된 욕구는 공동체를 파괴한다. 경제와 국가도 그 안에 정신이 스며 있을 때만 생명을 얻는다. 정신을 내쫓으면 조직은 서서히 죽어가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착각할 뿐이다.
공동체는 정신이 조직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 때 비로소 살아난다. 정신이 이끄는 정치가나 경제인은 딜레탕트도, 광신도도 아니다. 그들은 위험을 알면서도 사람을 ‘너’로 대하며, 정신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행동한다. 그리고 정신이 남아 있는 한, 그 위험은 결국 결실을 맺는다. 정신은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을 거부하지 않고 포괄한다.
노동과 소유도 정신이 스며들면 변한다. 노동은 의미와 기쁨을 얻고, 소유에는 경외와 나눔이 생긴다. 그때 이 두 영역도 단순한 ‘그것’이 아니라 ‘너’로 응답하기 시작한다.
결국 핵심 질문은 하나이다.
정신이 지금 이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가?
정신이 사회에서 분리되어 예술·철학·종교 한구석에만 갇힌다면, 우리의 공동생활은 ‘그것’의 폭정 아래 놓이고 영혼은 사라질 것이다. 정신은 결코 현실을 떠나서는 작용하지 않는다. 정신은 반드시 ‘그것’의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 ‘그것’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만 일한다. 세계가 정신을 받아들이고, 정신이 세계에 자신을 내어줄 때 양쪽이 함께 구원된다.
오늘날 정신은 약해지고 방황하며 가짜 정신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정신이 다시 “너여!” 하고 부를 수 있다면, 세계와 인간을 다시 일으킬 힘이 여전히 살아 있다.
'나-그것' 관계는 말 그대로 주체와 객체의 관계다. 상대는 사물이나 대상화된 존재로 간주된다.
인간도 기능적으로 접근하면 곧 '그것'이 된다. 이 관계는 도구적이고 목적지향적이다.
여기서의 '나'는 전체로서의 존재가 아닌,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적 존재에 불과하다.
'나-그것' 관계는 세상 대부분의 관계들 — 직장, 거래, 일상적 상호작용 — 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은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데, '너'를 '그것'으로 대하는 순간, 그 관계는 죽고 존재의 가치가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거나 역할로만 대하면, 인격적 만남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사회가 병들고 국가가 병드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직장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은 어떻게 대우 받길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