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완전한 존재로 사는 법

by 이문웅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며 늘 완전함을 꿈꾼다.
더 좋은 직업을 갖고,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지 않게 살고 싶다는 그 소망은

단지 욕망의 표현만은 아니다.


그건 우리가 ‘결핍’이라는 삶의 본질을

얼마나 절실히 체감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한 방식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은 늘 어딘가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채워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 부족함은 종종

피곤함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외로움으로,

또 어떤 날은 지독한 허탈감으로 변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완전해지고 싶다.
부족함을 벗어나고 싶고,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살고 싶다.


돈을 벌고 싶고,

좋은 집에 살고 싶고,

건강한 몸과 타인의 인정도 받고 싶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싶다’는 깊은 바람의 변형된 모습이다.


결국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 모든 움직임은,

자유롭고 안정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채웠다고 느끼는 순간,

새로운 결핍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더 가졌는데 더 허기지고,

더 이뤘는데 더 외롭고,

더 성공했는데 더 공허하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꿰뚫어 보았다.


“욕망은 충족되는 즉시 새로운 욕망으로 대체된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충족의 순간에도 결핍을 예감하고,

늘 그 너머를 본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다.
아니, 만족하기를 두려워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완전함을 붙잡는 순간 삶이 끝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도 문득 멈춰 서서 묻는다.


“내가 원하는 건 정말 무엇일까?”


결국 나는 ‘존재의 안정’을 원했던 것이다.
불안하지 않고,

위태롭지 않고,

자유롭게 나를 살아가는 조건.

하지만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소유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소유함으로써 존재를 확인하려 든다.”


프롬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이기보다,

‘소유’로 나를 입증하려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이런 삶이 과연 자유로운가.
완전함을 좇는 동안 우리는

불완전한 자신에게 무관심해지고,

그 틈을 불안이 파고든다.

결국 완전함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워하는 환상이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완전함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품는 일이다.


몽테뉴는 고백했다.


“나는 나를 관찰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흐트러짐과 부끄러움, 혼란까지도 숨기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응시하고 기록하는 그 태도가 철학이었고, 삶이었다.


시몬 베유는 더 나아가 말했다.


“약함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며, 그 안에서만 은총이 깃든다.”


우리가 가장 낮아졌을 때, 가장 많이 흔들릴 때,
그 안에야말로 삶의 빛이 스며드는 통로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제 안다.
철학자들의 말을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 문장을 삶에 들여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문장일 뿐,
살아 있는 사유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껴안기로 한다.
모자람을 견디고,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나를 움직이고, 나를 살게 했기 때문이다.

가끔 무너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예전엔 버티려 했다.
이제는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내가 되고 싶다.

회복은 단단한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다.
깨진 조각을 하나씩 주워 다시 이어 붙이려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혹여 그 회복이 실패할지라도,
나는 끝내 다시 일어나고 말리라는 그 잔인할 정도의 생명력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keyword
화, 목, 토, 일 연재
이전 09화살아 내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