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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 아니라 해방이다.

by 이문웅

해방을 맞은겁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이며 1948년엔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것이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공화정을 최초로 도입한 실제 인물은 서재필 박사님이십니다. 그는 김옥균 선생과 함께 부정부패로 썪어 문드러지고 무능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을 개혁하겠다던 갑신정변의 주역이었고 서재필 박사는 그와함께 개혁을 위한 혁명을 주도하였고 그 때 약관 20세로 가장 어린 투사였습니다. 그 길로 미국으로 망명하고 10년만에 1896년 돌아와 독립협회를 만들고 왕정으로부터 공화정으로 제국으로부터 민국으로 가자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1883년부터 외교적 무지와 국제 경제와 질서에 어두웠던 조선의 정부는 일본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배운 자본주의의 약소국 진출의 방법을 조선에 그대로 이용하는 수법에 걸려들어 1883년부터 일본의 차관을 대책없이 들여왔다가 국채를 갚아야 되다는 자각에 1차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갚으려 하였으나 그마저도 사기로 끝나버립니다. 이후 차관을 갚아야하는 시기에 차관을 못갚자 일본은 검은 속내를 들어내었죠. 그러나 1900년 초기에는 일본도 민주주의자들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당시 이토히로부미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동양에서 사용하면서 일본의 대단결을 외치며 일본의 부흥을 견인하고 있었고 그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1909년 아직 경술 국치가 오기 전 안중근 장군은 조선의 국모를 해한 죄라는 마음으로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합니다. 이듬해 1910년 이회영과 그의 식구들은 11월 이완용 교육대신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의 강요로 날인하게되는 한일병합에 날인하기 전 7월 즈음에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이주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웁니다. 그들의 싸움은 후에 임시정부가 됩니다.

한편 미국에서 활동하던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선생등이 활동하였는데 임시정부는 초대 국무총리로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추대합니다.

하지만 초기 이동휘의 자금횡령 문제로 충돌을 빚고 이승만은 미국으로 갑니다. 이후 한국사에 가장 비극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고 임시 정부는 완전한 이념갈등의 장이 되어버립니다.

일본은 무단통치와 문화통치를 거치며 식민지를 통치하였고 문화통치 시절 우리가 말하는 큰 저항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일은 현재까지도 국문학자들이 말하는 한국 문학의 전성 시대가 1920년대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의하하게 만듭니다.

저는 브런치에 '대한민국 건국영웅들'이라는 책을 내놓고 아직 출간은 하지 않았습니다.


80년를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역사를 다시 공부해보다 많은 것에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수도 우파도 아닌 그저 사실에 대한 얘기였고 역사는 정치에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간절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39년부터 일본이 진주만 습격으로 시작된 미국과의 전쟁은 한반도의 많은 것들을 징발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그것도 군표를 주고 거래를 하는 형태로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이 끝난후 1965년 한일외교정상화 때 정부에 배상한 것말고 개인적인 군표 교환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일본 패전 80주년이며 식민지 해방 80주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일본보다 GDP라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피해주의 역사관보다 사실주의 역사관을 가지고 일본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해방80주년을 함께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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