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창문 너머로 스며든 회색빛이 집 안 공기를 천천히 잠식했다.
그 빛은 사무실에서 매일 보던, 서류 더미와 회의록 위에 내려앉던 음울한 색이었다.
오늘은 연차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책상 위에 묶여 있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먼지, 모니터 속 잔뜩 쌓인 메일함,
그리고 늘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동료들의 모습까지,
모두 빗물에 번져 이곳까지 스며든 것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달력 속 빨간 펜으로 크게 동그라미 친 ‘연차’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린 날이었다.
그런데 막상 맞이한 휴일은 몸은 자유로워도 마음은 조금도 달콤하지 않았다.
점심은 대충 컵라면으로 때웠다.
김이 올라오는 그 순간만큼은 따뜻했지만, 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했다.
연차라 집에 있었지만, 하루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이력서만 붙잡았다.
‘새 회사’, ‘새로운 시작’—그럴싸한 문장을 머릿속에 떠올려 봤지만 손끝은 자꾸 멈췄다.
이력서를 채우면 채울수록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버텼던 지난 시간을
다시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자기소개서 첫 줄을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 보니 문장보다 한숨이 더 길어졌다.
그 사람만 아니면 이렇게 급하게 이직 준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팀장이면서도 늘 다른 사람 공을 가로채고, 잘못은 슬쩍 내 탓으로 돌리던 사람.
며칠 전 회의에서 그는 또 사람들 앞에서 은지를 깎아내렸다.
“그건 이미 지난번에 다 검토한 거잖아요.”
말끝을 올리며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엔 ‘왜 아직도 이걸 붙잡고 있느냐’는
비아냥이 묻어 있었다.
보고서 초안을 들고 갔을 때도, 그는 내용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다른 팀 책상 위에 툭 올려놓았다.
“이거, 네가 하는 것보다 걔가 더 잘할 거야.”
그 한마디에 속이 서늘하게 뒤틀렸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대신 차가운 물을 한 컵 들이켰다.
화를 씹어 삼키는 날들이었다.
그날 오후, 더 이상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노트북을 닫았다.
세탁기를 돌리고, 싱크대에 쌓인 그릇을 씻었다.
물에 손을 담그자, 미지근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지만
마음속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비에 젖은 공기가 벽지에 스며드는 것처럼 짜증과 피로가 온몸에 느릿하게 번졌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그녀는 스스로를 집 밖으로 밀어냈다.
어디를 가야 하는지 정하지 않았지만, 집 안에 더 있다가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빗물이 골목 바닥에 고여 잔물결을 만들고, 네온사인이 물 위에 뒤섞여 일렁였다.
골목 안쪽 포차가 눈에 들어왔다.
빗방울이 천막 위에서 튕겨 내려오며, 붉은 불빛이 물방울 속에서 번졌다.
그 불빛이 유일하게 따뜻해 보였다.
내리는 비와 함께 흘러들어 온 하루의 무게가 그 순간 잠시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천막을 걷자, 술냄새와 어묵탕의 짭조름한 냄새가 확 밀려왔다. 포차 특유의 냄새는 언제나 사람 마음을 풀어놓았다.
“왔네.”
고수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낡은 앞치마를 두른 그는 여느 때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술 좀 주세요. 그냥… 뭐든.”
그녀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잔을 받았다. 고수는 주전자 기울이듯 술을 가득 채우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녀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너무 미워요.”
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따랐다.
“오늘 하루 종일 이력서 썼거든요. 웃기죠? 이직하려고 쓰는 건데, 쓰면 쓸수록 내가 얼마나 버텼는지만 보이는 거.”
고수는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뭐가 제일 힘들었는데?”
그녀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회의 때 제 자료 뺏어서 자기 말처럼 발표했던 거. 그때 진짜… 손이 떨렸어요. 근데 웃었죠. 안 그러면 제가 예민한 사람 되니까.”
“그랬구나.”
“그리고 보고서 마감 당일, 제 컴퓨터에서 파일 빼서 자기 이름 올려서 낸 거. 그건… 진짜 한 달 넘게 잠을 설쳤어요. 아무도 몰랐고요. 다들 그 사람만 칭찬했죠.”
고수는 조용히 잔을 채웠다.
“그래도 너, 잘 버텼네.”
“아니요, 버틴 게 아니라… 그냥 무너져 있던 거죠. 오늘도 하루 종일, 그 인간만 지우고 싶었어요. 아니, 미운 게 아니라…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세상에서. 아… 아니에요. 그냥, 제 세상에서만.”
고수는 그녀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우며 말했다.
“그 정도 미움이면, 오늘 술값은 내가 낼게.”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잔 속에서 술빛이 반짝였다. 바깥에선 빗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점점 거세졌다. 그 소리가 세상의 모든 잡음을 삼켜버리는 듯했다.
그녀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술과 함께 긴 숨이 흘러나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난 몇 달 동안 켜켜이 쌓인 분노와 모멸이, 술기운을 타고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오늘만큼은… 그 인간을 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빗소리가 더 거세졌다.
고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행주를 집어 들어, 천천히 그릇을 닦았다. 오래전부터 수백 번 닳아 반질반질해진 그릇처럼 이 미움도 언젠가는 닳아 사라질 거라는 듯이.
그릇 위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녀는 무심히 그 물방울을 따라가다, 문득 마음이 한 뼘쯤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 단순한 움직임이 이상하게도 위로처럼 다가왔다.
그 순간, 이 자리만큼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