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마지막 손님이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음이 끊기고 카페 안에는 커피머신의 잔열과 은은한 원두 향만이 남았다.
형광등 대신 노란 조명이 바닥을 비췄고,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테이블 위를 부드럽게 스쳤다.
그가 들어왔다.
방송국에서 퇴근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주문은 늘 같았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잠깐의 대화.
커피를 마시는 건 핑계였다.
그녀는 커피를 내리며 물었다.
“오늘은 늦으셨네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회의가 길어져서요.”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시선은 오래 머물렀다.
주문한 커피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계산대 옆, 카운터 한 모서리에 기대 서 있었다.
서로의 사생활을 묻지 않았지만,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많은 것을 읽었다.
주로 마감시간 무렵이었다.
손님이 끊기고, 카페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를 닦았고, 그는 빈 머그컵을 손에 쥔 채 떠날 기색이 없었다.
평범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말끝마다 조심스레 감정을 숨겼다.
그 짧고 은밀한 시간들이, 그녀의 하루를 조금씩 흔들어놓았다.
밖에서는 방송국 건물의 불이 하나둘 꺼졌다.
그녀는 바닥을 쓸며, 그와 나누는 대화를 길게 이어갔다.
마치 서로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처럼.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대화는 느려졌고, 말 사이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녀는 트레이를 닦는 척 고개를 숙였고, 그는 빈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서로의 숨소리와 손끝의 움직임이 카페 안의 전부였다.
서로 유부남,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짧은 마감 전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안전하면서도 위험한 시간이 됐다.
밤이 깊어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가게 한쪽 조명만 남기고 나머지 불을 껐다.
따뜻한 빛이 나무 테이블 위로 길게 번졌다.
남자는 커피잔을 비운 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눈을 피하지 못했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 그녀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따뜻한 체온이 순간적으로 전해졌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멀리서 빗방울이 천천히 창문을 두드렸지만,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그 거리만 줄여왔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손등과 그의 손등이 스쳤다.
그 스침이 오래 머물렀고, 그 공기 속에서 서로의 숨이 뒤섞였다.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깊게 마주 보는 눈 속에 오래 전 잊었던 감정을 읽어냈다.
그 순간, 카페의 불빛이 유난히 희미해졌다.
그녀는 조용히 커피 잔을 치웠다.
마감 시간이 훌쩍 지나, 바깥 거리는 한산했고, 창밖 가로등 불빛만이 스며들었다.
남자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가 문을 잠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걸을래요?” 그가 낮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이어졌다.
몇 블록을 지나자, 눈앞에 작은 호텔 간판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호텔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췄다.
남자는 뒤에서 가볍게 등을 떠밀었고, 그 힘이 부드럽지만 분명했다.
객실 문이 닫히자, 바깥 세상과의 연결이 끊긴 듯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길이 목덜미로, 그리고 뺨으로 옮겨갔다.
숨결이 가까워지고, 숨이 가빠졌다.
벽과 그의 팔 사이에 갇힌 그녀는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빛이 얽히고, 손끝이 천천히 그녀의 손을 덮었다.
그 단단한 온도에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밖에서는 엘리베이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마저도 멀리 희미하게 흩어졌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심장이 규칙을 잃은 듯 두근거렸다.
그의 손이 천천히 손목을 타고 올라와 팔을 감싸자, 숨이 더 짧아졌다.
그 순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마를 스치던 입술이 뺨으로, 그리고 목선으로 내려왔다.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숨결이 교차하며 피부 위로 번졌다.
그녀의 등이 벽에 완전히 밀착됐다.
한 손은 그의 어깨를 붙잡았고, 다른 손은 허공을 더듬다 그의 허리에 닿았다.
숨이 섞이고, 옷자락이 느슨해졌다.
엘리베이터가 지나가는 소리가 또 들렸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었다.
바깥의 세계는 사라지고, 남은 건 좁은 객실과 두 사람의 뜨거운 숨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뜨거운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고, 손끝이 떨렸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고, 시선이 얽히는 순간 모든 게 무너졌다.
입술이 부딪히고, 숨이 삼켜졌다.
단단했던 벽 같은 그가 이제는 뜨거운 파도처럼 덮쳐왔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바깥의 소리도, 세상의 빛도 사라지고, 오직 숨소리와 심장 박동만이 방 안을 울렸다.
그러나,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그는 천천히 물러났다.
눈빛 속에 아직 말하지 않은 문장이 숨어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둘 사이에 남은 건, 들뜬 숨과 풀린 옷자락,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순간뿐이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제 이 문을 나서면, 이전의 두 사람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그날 이후, 그들은 조심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잠깐이라도 불러냈고, 출장이란 이름으로 같은 호텔에 묵었다.
멀리 가는 여행보다, 가까운 모텔에서의 한 시간이 더 달콤하다는 걸 알았다.
이런 만남이 잦아질수록, 서로의 생활은 부식되어갔다.
남편의 전화는 점점 귀찮아졌고, 그의 아내 이야기는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간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이 장기출장을 떠났다.
3주, 아니 어쩌면 한 달도 넘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비행기 표와 일정표까지 확인한 그녀는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며칠을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낮의 거실은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커피 향이 부드럽게 퍼졌고, 창밖으로는 초가을 햇살이 깊게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 평온이 오래가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현관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날, 그녀의 남편은 하루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출장 일정이 갑작스레 조정되면서, 한 달 만에나 볼 줄 알았던 아내를 3주 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멀리서도 늘 아내를 그리워했기에 깜짝 선물처럼 불쑥 돌아가면 그녀가 얼마나 반가워할까 상상했다.
따뜻한 저녁을 함께 먹고, 사온 작은 기념품을 건네며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긴 이동 끝에 도착한 집 앞,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을 보는 순간, 하루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현관 앞에 서자 익숙한 집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안에 있는 그녀의 기척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 한가운데 서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입술이 한 번 달싹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이 기울며, 커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갈색 물방울이 흰 대리석 바닥에 번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 안 공기는 낯설었다.
익숙한 향 사이로 스며든, 이 집에는 없는 다른 냄새가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 냄새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옷장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다른 남자의 셔츠 소매가 느슨하게 매달려 있었다.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야.”
짧지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에 방 안의 모든 공기가 멈춘 듯했다.
그녀는 무언가 변명을 찾으려 했지만, 입술이 굳어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준비한 말들이 죄다 무너졌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얼어붙어 가는 동안,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날 이후, 남편과 헤어진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잠깐 스쳐간 그 남자의 이름과 얼굴은 희미해졌지만, 버려진 그의 뒷모습만은 매일 또렷하게 떠올랐다.
문을 나설 때의 어깨, 대답 없이 닫히던 현관문, 집 안에 오래 남아 있던 옷 향기까지.
처음엔 생각보다 빨리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눈물로 사과하면, 그가 돌아올 거라고.
그러나 전화는 끝내 받지 않았고, 편지는 반송되어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자, 용서보다 어려운 건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꺼내놓는 일이었다.
그녀는 점점,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짚으며 하루를 보냈다.
휴일 오후, 창문을 열어둔 채 함께 낮잠을 자던 순간들,
말 한마디 없이도 통하던 공기.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비가 오래 내린 밤이었다.
골목 끝 천막 불빛이 빗물에 번져 흔들렸다.
그녀는 우산을 접은 채 걸었다.
머리칼과 어깨가 젖어도 상관없었다.
천막을 젖히자, 포차 안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국물 끓는 소리, 기름 튀는 냄새,
그리고 고수가 술잔을 닦는 손길.
“오랜만이네요.”
그는 짧게, 그러나 알아보는 눈빛으로 말했다.
“비 피하려고요.”
“여긴 비 피하는 데가 아닌데요.”
그녀는 문 옆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 결혼 시절 그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셨던 자리였다.
겨울밤에는 김이 오르는 국물에 소주를,
여름밤에는 시원한 맥주와 오징어 숙회를.
좋은 날에도, 싸운 날에도 늘 이 자리였다.
고수는 소주병을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뚜껑 돌아가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안주는 뭐로?”
“아무거나… 뜨거운 걸로.”
첫 잔을 비웠을 때, 고수가 무심히 말했다.
“그 사람, 요즘도 와요.”
그녀의 손이 멈췄다.
“혼자?”
“네. 혼자.”
그때, 천막이 젖혀졌다.
바람과 빗물이 함께 들어왔다.
그가 서 있었다.
잠시 멈춘 발걸음, 스치는 눈빛.
그 안에는 함께한 수많은 밤이 겹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앉았던 날,
그가 결혼사진을 찢어 바닥에 던지던 순간까지.
그는 고개를 돌려 다른 자리에 앉았다.
고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잔을 놓았다.
둘 사이엔 빗소리보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수저를 들었다가 놓았다.
한마디면 될 것 같았다.
그 한마디가 목구멍을 끝내 넘지 못했다.
술이 한 병, 두 병 비워지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뒤졌다.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고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사람한테… 전해주세요. 미안하다고.”
봉투 속에는 찢겨나갔던 결혼사진이 있었다.
그녀는 조각난 날들을 주워 담듯, 테이프를 겹겹이 붙였다.
갈라진 자국 위로 투명한 빛이 번졌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여전히, 그날처럼 웃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머리카락과 어깨가 금세 젖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후, 고수가 봉투를 그의 앞에 놓았다.
그는 사진을 오래 바라보다, 마침내 두 손으로 접었다.
마치 마음을 조심스레 개키듯.
고수는 빈 접시에 따뜻한 물을 부었다.
물결이 천천히 한 바퀴 돌 때마다,
두 사람의 상처가 조금씩 부드러워지기를,
언젠가 다시 마주 앉아 웃을 날이 오기를,
조용히, 오래 기도했다.
밤은 더 깊어졌고. 빗소리는 천막 위에 오래도록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