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넷플리스를 시리즈 하나를 정주행 했다. 아주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아마도 THE 8 SHOW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아 있기에 그랬던 것 같다.
웹툰을 원작으로 탄생한 더 에이트 쇼는 8명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다. 각자 상처가 있고 이 사회에서 외면당했거나, 실패했거나, 좌절을 경험한 어쩌면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삶을 이어갔던 사람들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쇼를 주관한 보이지 않는 주체자는 이러한 사람들만 모아서 게임을 제안한다.
그 게임은 아주 단순한 규칙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규칙 때문에 쇼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망가져 간다. 그냥 주어진 것에 만족했다면 처참한 결말이나 서로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더 에이트 쇼는 말해준다.
1층 더 에이트 쇼
새벽까지 밤잠을 줄이면서 본 이유는 출연진이 너무 화려해서도 아니고, 원작을 좋아했기 때문도 아니다. 무엇보다 멈추지 못한 것은 이 시리즈에서 설정된 각 층에 대한 설정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처참한 인생을 경험하고 살고 있던 참여자들은 제안을 받고 모두 한 곳으로 모이게 된다. 마치 오징어게임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도 나온다. 입장하기 전에 8장의 카드 중 한 장을 뽑아야 한다. 모두 그 카드가 의미하는 진정한 가치를 몰랐기에 자신의 감에 따라서 카드를 고르고 입장을 한다.
카드는 각 층에 있는 방을 의미하고 참여자들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게임을 시작한다.
여기서 카드가 주는 의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이지 않는 아니 너무 잘 보이는 우리 사회의 계급을 의미한다. 누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자로 태어나서 아무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들을 이루며, 실패조차 즐거움을 승화를 시키는 삶을 사는 반면, 누구는 매시간 사투를 벌이며 먹고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지만 결국 남는 것은 빚이 전부인 그런 인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길거리에서 그리고 아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인생의 격차를 우리는 아주 쉽게 발견한다. 서로 알고 있지만 그 계급장이 군인처럼 표시된 것이 아니기에 그냥 모르는 척 부러워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면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한 시대를 살아간다.
더 에이트 쇼에서 그 계급은 층별로 정해진 보수로 표현된다. 층이 높으면 시간당 자동으로 받는 금액의 액수가 절대적으로 높게 설계된 것이다. 결국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돈의 가치는 자신의 지위에 따라서 달라진다. 나는 이 부분에서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를 공감하며 들여다보았다.
최저 시급이라고 국가가 정한 그 틀에서 최저의 인생을 살지, 더 높은 시급을 받을지 우리에게 사실 큰 선택권은 없다. 어린 시절 부모님들은 자녀의 시급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공부하라는 말을 미친 듯이 하며 자녀들 학원비를 벌기 위해 밤낮으로 몸을 굴린다. 물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전혀 공감대가 없기에 그 의미를 자녀들은 쉽게 무시한다.
왜 하기 싫은 공부를 그렇게 하라고 하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 입장은 그런 것이다. 1층에서 태어난 난 영원히 1층에서 마감해야 하지만 너는 적어도 3층에서라도 살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는 것을.
부모도 1층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처음부터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쇼에서 1층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10억이라는 돈을 모으는 것을 목표로 삼고 모든 것을 걸고 버티는 것처럼 그들도 그랬다. 그런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현실은 더 에이트 쇼처럼 냉혹했기에 단념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참으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부자는 계속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할 확률이 매우 높다. 물론 몇 번의 큰 기회가 찾아오기는 한다. 하지만 기회는 실패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단어이다. 그리고 재테크에서 기회란 노력이라는 것의 반영을 극도로 적게 적용시킨다. 결국 무조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돈이 돈을 만들고, 돈 앞에서 비참해지고, 돈 앞에서 비굴한 것도 그냥 넘기게 되는 것. 이런 과정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서민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더 에이트 쇼에 출연진들은 정말 완벽한 연기를 보여줬다. 각자의 역할에 맞는 처절하고 오만한 태도를 스크린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했다. 부정할 수 없는 그들의 연기에 감히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더 에이트 쇼 출연진
나는 시청하면서 계속 나는 어느 층에 살고 있는 걸까? 계속 생각했다. 분명 내가 걸어온 삶은 아래층의 삶이다. 우리 부모님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그래서 발악하고 나를 던져가면서 조금이라도 올라가려고 애를 썼다.
1층이 각 층의 인분을 받아서 보관하는 것을 선택한 것처럼 나 또한 비굴함을 선택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가 강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그랬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갈 목돈을 마련하기 수월했기에 젊음과 배고픔은 언제나 따라다녔다. 그런데 돌아보니 내가 그 돈을 조금 얻기 위해서 날린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시간이다. 나는 젊음을 그 대가와 교환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요즘 느끼곤 한다. 물론 마흔 살은 아직 청춘이다. 같이 공부하는 어른들은 나를 보며 부러워한다. 그런데 나도 요즘 철없어 보이는 이십 대를 보면 미친 듯이 부럽다. 그들이 하는 모든 자유분방한 행동과 그 대책 없는 생각들조차 부럽다.
이미 마흔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 많기에 그들이 그냥 부러운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항상 부러워하며 살아간다. 만족감은 비교할 때 처참히 사라진다. 아마 쇼에서 각 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층도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시간을 늘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교할 대상이 생기면 욕망은 자라난다. 아주 빠른 속도로.
이런 것을 볼 때 내가 선택한 퇴사는 어쩌면 내 욕망이 만들어낸 망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무엇인가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겠다고 그 안전한 울타리를 나왔지만 그다지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직도 더 많은 것을 갈망하기에 만족감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에이트 쇼처럼 모든 쇼가 끝나고 나면 그 소중함을 느낄지 모르겠다.
더 에이트 쇼는 말하는 것 같다.
변하는 것은 없다고 그러니 그냥 받아들이고 살라고. 욕심부리지 말고 현재에 충실히 그냥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지만 잊지 말라고 너는 인간이라고 그러니 탐욕과 욕망을 멀리 할 수 없다고.
나는 동감하는 편이다. 어쩌면 그랬기에 우리가 이토록 발전하지 않았겠는가.
과열된 것은 사실이다.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빈부격차는 좌절과 포기를 아래층 사람들에게 끝없이 준다. 가진 자는 계속 웃고, 없는 자는 계속 슬프다. 그렇지만 돈으로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느 순간이 오면 느끼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목표를 달성했을 때 찾아오는 허망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난 이 정도 돈만 있으면 소원이 없어!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그 돈으로 하면서 행복하게 살 거야! 이렇게 외치던 사람 중 한 명이 나였기에. 그 목표가 너무 작았던 컸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느끼게 된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를 가득 채워주는 건 우리 몸값이 아니라 자기 주변을 채우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라는 것을.
아마도 웹툰 원작 머니게임도 그렇고 더 에이트 쇼도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