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의 〈군상〉과 영화 〈맨 프롬 어스〉
여러 기관에서 이응노의 예술 세계를 강의하며 〈군상〉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곤 했다. 그때마다 이 작품은 화가의 개인사와 시대의 상처로 읽혔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다시 그림 앞에 섰을 때, 그것은 더 이상 화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림은 내 안의 군상, 내가 살아오며 만난 수많은 얼굴로 다가왔다.
살아오며 나는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났다. 부지런한 사람, 계산이 빠른 사람, 느리지만 정직한 사람,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 그리고 뒷담화를 즐기면서도 그 주인공 앞에선 웃는 사람까지. 예전엔 그저 스쳐 가는 풍경 같았지만, 요즘 들어 그 얼굴들이 다르게 느껴진다. 각자 나름의 사연이 있고, 그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작년부터 인간의 본질이 궁금해졌다. 왜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할까. 무엇이 인간의 성향을 만들고, 어떤 힘이 그들을 움직이는 걸까. 그런 물음 끝에 읽기 시작한 책이 <인간 본성의 법칙>과 <종의 기원>이었다. 이미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곁에 두고 있었기에, 세 권의 책은 나를 ‘인간 관찰자’로 만드는 안내서가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작은 표정, 손끝의 움직임 하나에도 그들의 본능과 감정이 스며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하라리는 '인간은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한다'라고 했다. 그 말처럼, 인간은 결국 다른 인간 속에서만 인간이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것이 진실이든 위로이든, 혹은 생존의 기술이든 간에. 신화, 돈, 명예, 사랑처럼 실체 없는 개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으며 문명을 세우고 관계를 이어왔다. 이 믿음의 뿌리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본능, 소속의 욕망에 있다. 우리는 무리에서 벗어나면 불안을 느끼고, 다시 군중 속으로 돌아가 안도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이 곧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로버트 그린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보려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그 말처럼 인간의 성향은 본능과 선택의 경계 위에 있다. 어떤 이는 타인을 지배하려 하고, 어떤 이는 사랑받기 위해 존재한다. 어떤 이는 질서를 원하고, 어떤 이는 혼돈 속에서 창조한다. 〈군상〉 속 인물들이 제각각의 몸짓으로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이유는, 그 다양한 본능의 파동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군상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는 공격성과 연민, 욕망과 두려움, 고독과 소속의 양면성이 공존한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은 단순한 생존의 기계가 아니라 감정의 균형으로 진화한 존재다'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서로를 통해 회복한다. 그 반복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결을 다듬으며 세상 속 자리를 찾아간다.
얼마 전 남편이 영화 한 편을 추천했다. “이건 꼭 봐야 해. 당신도 좋아할 거야.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거든.” 그와 함께 본 영화는 <맨 프롬 어스(The Man from Earth)>였다. 요즘은 아이에게 영화를 추천받기도 하고, 가족이 건네는 작품으로 주말의 시간을 채운다. 영화는 시나리오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다. 교수 존이 친구들에게 자신이 1만 4천 년 동안 살아온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이야기. 믿을 수 없다는 친구들 앞에서 존은 담담히 말한다.
“나는 단지 살아왔을 뿐이오. 시간은 나를 비켜가지 않았고, 다만 지나갔을 뿐이오.”
결국 인간은 ‘살아가는 중’ 일뿐이다. 영화 속 존이 시간의 흐름을 견뎌낸 인간의 상징이라면, 그 안에 함께 한 이들은 그 시간을 함께 건너는 인간 군상들의 초상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인간 군상을 마주한다. 친절한 사람, 무심한 사람, 바쁘게 걷는 사람, 가진 것 밖에서 무언가를 찾는 사람,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슬픈 얼굴을 한 사람. 예전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그들의 표정 하나, 걸음 하나가 다르게 느껴진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집단적 허구’, 로버트 그린이 말한 ‘감정의 메커니즘’을 떠올리면 거리의 한 사람 한 사람마저 하나의 살아 있는 인문학 텍스트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발산하고, 역할을 수행하고, 서사를 쌓아간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삶이란, 거대한 군상화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려지는 초상 같기도 하다. 그림 속 인물들이 나이기도 하고, 내가 본 누군가이기도 하다.
이응노는 감옥에서도 3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절망의 공간에서도 그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속에는 사랑보다 깊은 두려움, 희망보다 짙은 체념이 섞여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온기를 품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이 끝내 놓지 못한 마지막 감정, 연대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윈은 말했다. “가장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 이응노의 삶이 그 증거였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시대에 적응하며,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다시 일어난다. 다양한 군상들 속에서 나는 문득 ‘나’라는 존재의 결핍과 미약함을 느낀다. 그러나 바로 그 결핍과 미약함 속에 인간의 위대함이 숨어 있다.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서는 반복,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자 생존의 미학이다.
〈맨 프롬 어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존은 떠난다. 그는 수천 년을 살아왔지만, 결국 인간으로서의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떠난 자리엔 긴 침묵이 남고, 나머지 군상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존 옆에는 그가 무엇이든 아무런 것도 상관하지 않는 한 사람만 남는다. 그림을 바라보다 보면, 나는 내 안의 여러 ‘나’와 마주하게 된다. 진실을 말하고 싶은 나, 불안한 나, 고통스러운 나. 결론은 늘 하나다.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처럼 그저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뿐. 살다 보면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가 나를 시기와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런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갔다.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연민의 감정을 품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반응하는 존재라는 걸, 결국 그들도 ‘살아가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 내게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그 바람이 결국 그들 자신에게서도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인간을 관찰하며 얻은, 가장 단단한 결론이다.
〈군상〉을 바라보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의 모습이 겹쳐진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림 앞에 서며 나는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고, 성장에서 성숙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를 성숙하게 만든 그 시간의 경험이 참 감사하다.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는 경험. 아마 그것이 예술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오래된 마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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