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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와 기도의 순간

뭉크의 절규, 엘 그레코의 베드로

by 김상래

절규와 기도의 순간

“너무 아파서 말로는 안 되고,

소리로라도 세상에 자신을 알리고 싶은 외침.”

— ‘절규(絶叫)’의 뜻

에드바르 뭉크, 《절규(The Scream)》, 1893,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Norway)

붉은 하늘 아래, 절규의 탄생

끊을 절(絶)에 부를 규(叫).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만 허락된 절규의 순간을 품고 산다. 다만 어떤 사람은 그 절규를 세상 밖으로 쏟아내고, 어떤 사람은 절규를 가슴 깊은 곳에 묻은 채 하루를 견딘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어느 날, 노을빛이 핏빛으로 번지던 오슬로의 언덕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친구들과 걷던 그는 문득 몸이 휘청거릴 만큼의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날 뭉크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태양은 지고, 구름은 붉게 물들었다.

나는 자연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그린 《절규(The Scream, 1893)》는 그 불안과 외로움의 절정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어머니와 누이를 병으로 잃은 그는 평생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그림 속에 담았다. 절규하는 인물의 얼굴에는 인간 자체의 두려움이 서려 있다. 뭉크는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소리를 색으로 그려냈다. 우리는 그 앞에 설 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절규를 듣는다.

절규의 또 다른 얼굴, 엘 그레코의 베드로

나는 뭉크의 절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엘 그레코의 《통회하는 성 베드로(St Peter in Penitence)》를 선물하고 싶다.


엘 그레코, 《통회하는 성 베드로》, c.1600, 톨레도 엘 그레코 미술관

엘 그레코의 베드로는 울지 않는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만, 그 시선에는 격렬한 통곡 대신 깊은 자책과 기도가 담겨 있다. 절규의 인물이 세상을 향해 고통을 던지고 있다면, 베드로는 그 고통을 안으로 끌어안는다. 세상 밖으로 울부짖는 대신 품고, 터뜨리는 대신 기도한다. 두 그림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면 어떨까.

하나는 고통을 폭발시켜 존재를 증명하고, 다른 하나는 고통을 끌어안아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엄마가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가을빛이 한창 물든 날, 나는 동생과 함께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 허리 수술 이후 걷기가 힘들어진 엄마가 백내장 수술을 마치고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나왔다. 어떤 경우에도 ‘괜찮다’며 혼자 걷던 엄마가 그날은 내 손을 꼭 잡았다. 마치 낯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내 손을 움켜잡았다.


그 작은 손끝에서 커다란 불안이 느껴졌다. 엄마는 좀처럼 ‘힘들다’ 거나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엄마가 20분 남짓한 수술을 마친 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야”라고 말했다.

그 순간, 인간의 행복 조건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마음껏 팔을 휘저으며 걸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일상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늘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안으로 삼키며 살아왔다. 아빠의 영정 앞에서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보면 세 자매가 아무리 매주 만나 즐거운 일을 만든다고 해도 늘 곁에 있던 남편의 자리는 결코 대신할 수 없다는 걸 느낀다. 엄마는 그 어떤 순간에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엘 그레코의 베드로처럼 눈물은 있지만 비명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를 떠올리면 그림 속 베드로의 손끝이 꼭 엄마의 기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세상의 절규를 대신 끌어안은 사람이다.

사랑으로 이르는 길

절규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절규라도 할 수 있다는 건,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문제는 그 절규를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에 있다. 누군가는 타인을 향해 외치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해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모든 감정은 꺼내 놓을 때 비로소 치유된다.

이따금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이 자신 안의 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조용히 들여다본다면 타인을 미워할 일도, 비교할 일도 줄어들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그것이 절규를 잠재우는 첫걸음이 아닐까.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절규할 이유를 준다. 그 소리를 삼키며 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에게 누구든 엘 그레코의 베드로를 조용히 건네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엄마가 그랬듯, 조용한 인내 속에도 한 사람의 빛이 있다. 그 빛이 우리 세 자매를 비추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고 믿는다. 모든 절규의 끝에는 언젠가 누군가를 살리는 기도의 순간이 있다.

“나는 자연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에드바르 뭉크의 일기, 18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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