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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단편소설>_두 개의 창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작품을 보다가

by 김상래
작가 노트
〈두 개의 창〉은 내가 파리에서 머물던 두 공간, 몽마르트르와 정티이의 기억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해 가던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몽마르트르의 집에서는 ‘프레임’의 아름다움을 배웠고, 정티이의 방에서는 ‘온기’의 본질을 알았다.
그 온기는 난방의 열이 아니라, 낯선 이들이 건넨 말 한마디, 오래된 마루의 삐걱임 속에 숨어 있었다.이 글은 그 미세한 떨림을 잊지 않기 위한, 나 자신에게 보내는 영화적 회상이다.


빌헬름 함메르쇠이(Vilhelm Hammershøi)〈햇빛이 드는 방 (Interior with Sunlight on the Floor, 1906)〉 테이트 브리튼 소장

파리의 겨울은 유리창에 닿는 빛으로 시작해,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으로 끝난다. 혜미가 처음 머물던 집은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의 작은 스튜디오형 아파트였다. 발코니에 서서 골목 지붕들을 내려다보면, 카유보트의 그림이 떠오르곤 했다. 그가 그린 발코니 위의 남자처럼, 그녀 역시 회색빛 도시의 숨결을 내려다보았다. 창문마다 걸린 흰 커튼, 근거리에서 번지는 카페의 음악.


그곳은 파리의 중산층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이었고, 군데군데 작은 파란색 별 세 개가 붙은 호텔 간판이 빛바래게 남아 있었다. 역에서 내려 오 분도 채 걷지 않아 닿는 거리, 말 그대로 ‘역세권의 원룸’. 중앙난방이 들어와 겨울임에도 반팔을 입고 있을 만큼 따뜻했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원목 가구와 인덕션이 놓인 작은 주방, 내 취향에 꼭 맞았다. 하늘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 그 모든 것이 내가 꿈꾸던 파리의 모습이었다.


낮의 빛은 벽을 타고 흘러 방 안을 물들이고, 저녁의 어둠은 조용히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곳은 그저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시간의 결이 스며들어, 온기로 변해 머물다 가는 한 장면이었다. '파리의 공기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 사이에 머문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조금은 더 나은 꿈을 꾼다.'


아침이면 창가에서 글을 쓰고, 저녁이면 벽조명 아래서 영화 시나리오를 다듬었다. 그녀는 그 방을 사랑했다. 따뜻하고, 고요하며, 그 안에 있으면 자신이 한 편의 영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 집 뒤로 몽마르트르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십 분 남짓 걸으면 사크레쾨르 성당이 나왔고,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언제나 같은 빛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올수록 집세는 조금씩 높아졌다. 계약 갱신을 앞두고 혜미는 결국 방을 비워야 했다. 떠나는 날, 카펫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손끝에 남은 온기가 지난 시간의 체온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몽마르트르의 불빛에서 한참을 벗어난, 파리 남쪽 언덕 마을 정티이(Gentilly). 그곳에 혜미의 새 집이 있었다. 역에서 내려 언덕을 따라 십 분쯤 올라가면 오래된 나무 대문이 보였다. 대문을 밀면 가운데로 난 정원길과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혜미의 방은 1층 오른쪽. 하얀 철제 덧문이 달린, 세월의 냄새가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문을 열면 왼쪽 복도 끝엔 욕실이 딸린 침실, 오른쪽엔 작은 주방과 거실이 있었다. 오븐, 세탁기, 냉장고, 오래된 나무 테이블 하나. 모든 것이 제 역할을 다하지만, 그 안엔 시간이 빚어낸 불완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침실 벽에는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Vilhelm Hammershøi)의 〈햇빛이 드는 방 (Interior with Sunlight on the Floor, 1906)〉이 걸려 있었다. 텅 빈 방 한가운데로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그림. 그녀는 매일 그 빛의 자취를 바라보았다. 그림 속 정적이, 그녀가 숨 쉬는 공기와 닮아 있었다.


“이 그림은 내 방의 또 다른 창 같아.”

하나는 세상의 바깥을 향한 창, 다른 하나는 마음의 안쪽을 향한 창이었다. 문틈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고, 라디에이터는 늘 미지근했다. 걸을 때마다 마루가 삐걱거렸다. 밤이 되면 옆집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그녀는 그 소리들을 이 도시의 숨결이라 믿으려 했다. 그 소리들이 있는 한, 자신도 이곳에서 아직 살아 있다고. 집주인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부부였다. 혜미가 직접 월세를 전하러 갈 때면, 그들은 화덕 피자와 스파클링 와인을 건넸다.


“집이 낡아서 춥지요? 불편한 게 생기면 언제든 얘기해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이방의 겨울을 조용히 데웠다. 혜미는 그제야 알았다. 온기는 불이 아니라, 사람이 남기는 흔적이라는 것을. 한국에서 친구 둘이 놀러온 것은 그런 겨울의 한가운데였다. 그들은 파리의 낭만을 기대했지만, 정티이의 방에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건 추위였다.


“이게 난방이야? 손이 얼어붙을 것 같아.”


혜미는 웃으며 라디에이터를 가리켰다.


“이 정도면 괜찮아. 빛이 잘 들어오니까.”

“햇빛으로 버티는 거야?”


그 말에 셋 다 한참을 웃었다. 웃음 끝엔 묘한 공감이 남았다. 밤이 깊어지자 친구들은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혜미는 조용히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 아래 라디에이터가 희미한 열을 내뿜고 있었다. 덧문을 조금 열자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고, 그 위로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화덕 연기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모든 것이 차가웠지만, 그 속에서만 살아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노트를 펼쳤다.


‘빛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오랜만에 쓴 문장이었다. 몽마르트르의 방에서 배운 빛, 정티이의 방에서 배운 그림자. 그 둘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몽마르트르에서 나는 빛의 프레임을 배웠고, 정티이에서 그 빛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장면을 배웠다.”


창문 밖으로 새벽의 첫 기차가 지나갔다. 라디에이터 위 찻잔에서는 아직 미약한 김이 피어올랐다. 혜미는 덧문을 닫으며 천천히 속삭였다.


“이 추위마저 언젠가는 내 영화의 한 장면이 되겠지.”


그녀의 방 안에는 여전히 바람이 들었지만, 마음에는 낯선 온기가 머물렀다.



음악은 벤자민 비올레이(Benjamin Biolay)의 겨울 정원(Jardin d'h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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