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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바람이 붉은 바퀴를 돌릴 때

모드 루이스의 그림을 보며

by 김상래
모드 루이스.jpg 모드 루이스/Carriage Ride/ 1960년대쯤/ Oil on board, 대략 30 × 35 cm/캐나다 개인 소장

흐릿한 기억이 남기는 자리

아이가 마음 가는 대로 그려낸 듯, 꾸밈없고 담백하다. 미술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자유롭게 표현한 그림 같다. 단순함 속에 오히려 경쾌한 생동감이 피어났다. 그것이 내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앞으로 달리는 말의 다리는 어딘가 길이가 맞지 않아 살짝 어긋나 있다. 하지만 그 어설픔이 오히려 그림의 결이 된다. 이런 투박한 생략과 순박한 과장은 순간적으로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정확함 대신 ‘기억 속 풍경의 감각’을 남기려는 마음이 닮아서일 것이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단순해진다. 오래된 기억 속 집, 나무, 마차, 네 사람, 강아지, 꽃, 그리고 하늘—형체만 남은 잔상들이 조용히 스쳐 지나간다. 마치 마음 한켠에서 바람이 지나가듯.


기억은 늘 조금 비어 있는 상태로 남는다. 그래서일까. 내 삶의 장면들도 이 그림처럼 선명한 몇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조용히 스러진다. 분명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믿었던 날도 다시 떠올려 보면 몇 가지 요소만 남아 있다. 그날의 표정은 흐릿하고, 소리는 반쯤 지워지고, 나머지는 태양 아래 바랜 필름처럼 흐려진다. 기억이라는 건 결국 구체적인 사실보다 그날의 공기와 마음의 온도 같은 것들이 오래 남는 법이다.

루이스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불필요한 것들은 비워두고 꼭 남아야 할 장면만 담아낸 듯한 담백함이 느껴졌다. 내 삶도 조금씩 복잡함을 덜어내고 그 단순함을 향해 천천히 가벼워지고 있다.


사람은 늘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애쓴다. 보고 느끼고 성취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붙인다. 그러다 지금 눈앞에서 피어난 작은 꽃 하나를 스쳐 지나가고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마저 놓친다. 그림 속 마차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바퀴의 모양이 완벽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속도로 꾸준히 굴러간다. 내 삶도 그러면 좋겠다. 가끔은 짐을 가볍게 내려놓을 때 비로소 길이 또렷해진다. 오늘 하루가 건네는 작고도 확실한 기쁨을 붙잡으려는 그 마음, 그것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렇게 쌓인 순간들이 결국 우리가 향할 내일을 천천히 다시 그려준다.


사소한 하루가 모여 가족이 된다

이런 생각을 하자 아이 초등학교 중학년쯤 안성팜랜드에서의 하루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 우리는 노란색 네 발 자전거에 올라 넓은 들판을 가로질렀다. 가을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길가에는 분홍빛 안개처럼 몽환적인 핑크뮬리가 바람에 따라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자전거를 다 탄 후에는 그 길을 걸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깔깔거리던 그 순간이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오레오 츄러스를 들고서 장난스럽게 ‘크로스!’를 외치며 찍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사진 한 장이 없었다면, 그날의 웃음도 바람처럼 흩어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평범한 하루의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 가족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우리는 거창한 이벤트 대신, 사소해서 더 오래 남는 기쁨의 순간들로 하루하루를 채워갈 것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유찬과 유림은 강아지처럼 우리를 반겼다. 보통 고양이는 주인을 따라다니지 않지만, 우리 집 고양이들은 어쩐지 예외였다. 마치 오래 기다린 가족이라도 만난 듯, 꼬리를 살랑이며 우리 곁을 따라다녔다.

아이는 유찬이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 신랑과 나는 각 방과 거실, 화장실을 돌며 고양이 배변을 치운다. 각자 바쁘게 움직인다. 그 순간 저마다의 역할이 맞물리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따뜻하게 전해진다.

20210925_140836.jpg 오레오 추러스의 기억


바퀴가 굴러가는 동안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

문득 그림 속 빨간 마차의 바퀴가 크게 돌아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 바퀴는 마치 우리 삶의 바퀴처럼 오늘도 쉼 없이 굴러간다. 좋은 날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겐 평범한 날도 조금씩 빛을 낸다. 어떤 하루라도 그 안에서 좋은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은, 결국 행복을 멀리서가 아니라 오늘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마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누군가의 희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고, 묵묵히 하루를 쌓아가는 손길이 모여 만들어진다. 인생의 길은 언제나 맑지만은 않다. 화창한 날 뒤에는 흐린 날이, 흐린 날 뒤에는 바람 센 날이 온다. 하지만 그 길가에도 늘 들꽃이 피고, 언덕 위의 나무는 제 계절을 잊지 않는다. 하늘과 구름은 언제나 우리 위를, 느린 속도로 따라온다.


마음을 닫지 않는다면, 그 길가의 들꽃과 하늘의 구름처럼 작은 풍경들이 언제나 선물처럼 우리 곁에 머문다. 삶은 거창한 곳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다. 작은 하루들이 쌓여 서서히 모양을 갖춰가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길은 변하고 계절은 흘러가지만, 우리가 함께 만든 오늘들이 언젠가 꿈꾸던 삶으로 이어져 있을 거라 믿는다.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한, 우리의 이야기도 멈추지 않는다. 모드 루이스의 그림처럼, 단순하지만 따뜻하게— 조용하지만 끝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줄 힘을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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