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추워지면 생각나는 어린 시절의 무용 수업, 그리고 드가의 그림
학교와 도서관, 박물관 등에서 미술 인문학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여행에서 모아 둔 내용을 바탕으로 유럽 7개국 미술관의 대표 작품을 소개합니다.
왜 드가는 무대가 아닌 연습실을 그렸을까?
오래된 기억이 열린 순간
요즘처럼 날씨가 부쩍 추워지면, 중학교 체육관에서 타이즈를 입고 무용수업을 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차가운 바닥에 발끝을 대고 서 있으면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지요. 선생님의 손짓에 맞춰 조용히 동작을 따라 하던 그 고요한 순간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공기와 긴장은 훗날 오르세 미술관에서 〈발레 수업〉을 마주했을 때, 오래 묵은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나듯 제 마음을 조용히 두드렸습니다.
유리 지붕 아래로 내려오던 습기 어린 공기 속에서 드가의 〈발레 수업〉은 조용히 제 앞에 걸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도, 그림 속 공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서 발끝으로 리듬을 맞추는 숨소리와 지팡이가 바닥을 톡 두드리는 소리가 은근히 들려오는 듯했지요.
그날 이후로 제게 드가는 ‘발레 화가’라는 별명보다 무대 뒤의 삶을 가장 정확한 눈으로 기록한 예술가로 남아 있습니다.
무대 뒤의 진짜 시간
5번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려한 무용수가 아니라, 지팡이를 짚은 노 교사 쥘 페로입니다. 그는 화면 중앙에 조용히 서서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발레리나들에게 동작의 흐름을 알려줍니다. 오랜 세월 무대 위에서 익힌 리듬이 여전히 그의 손끝에 남아 있는 듯합니다.
페로를 중심으로 발레리나들은 서로 다른 자세로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어떤 소녀는 팔을 양옆으로 내린채 다음 자세를 기다리고 또 다른 소녀는 발끝을 바닥에 살짝 붙인 채 숨을 고릅니다. 화면의 왼편으로 크게 보이는 소녀들은 각각 노란색과 초록색의 커다란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연습실은 소박합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이, 마룻바닥에는 사용 흔적만이 고요히 남아 있습니다. 드가는 이 평범한 공간 속에서 ‘진짜 시간’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바라본 것은 무대 위의 완벽한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 무대 뒤에서 끝없이 반복해야 했던 ‘노력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백조의 호수 2막처럼 화려한 무대 장면을 떠올립니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무용수들이 백조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드가의 눈에는 그 무대가 완성되기 전의 시간이 더 선명하게 보였지요.
첫 조명이 켜지기 전, 발레리나들은 거울 앞에서 같은 동작을 수백 번 반복합니다. 팔의 각도는 조금씩 다시 고쳐 잡고, 발끝은 하루에도 여러 번 붓곤 합니다. 무대 뒤 좁은 통로에는 긴장한 숨소리가 가늘게 퍼져 나옵니다. 드가는 바로 그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우아한 백조로 서기 전, 발레리나들의 발가락은 이미 뒤틀려 있었습니다. 강수진의 발가락이 그러했듯, 아름다움은 늘 고통의 반대편에서 자라지요. 동작 하나를 살리기 위해 턴을 반복하고, 아라베스크를 끝없이 다듬습니다. 지쳐 벽에 기대면 소녀들의 어깨가 가쁘게 오르내리지요.
드가에게 예술은 무대 위 한순간의 빛이 아니었습니다. 무대의 빛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인 땀과 긴 기다림에서 시작됩니다. 그 과정 자체가 드가에게는 예술이었지요.
19세기 파리는 오스만 남작의 도시 개조로 완전히 새로워지고 있었습니다. 넓은 대로가 생기고,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면서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떠올랐지요. 부유한 중산층이 극장과 카페를 드나들며 ‘파리의 황금기’를 만들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 빛나는 무대가 만들어지기 위해, 뒤편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고된 연습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당시 발레학교 아이들은 ‘발레라트(ballet rats)’라고 불렸습니다. 대부분 빈곤층 가정에서 왔고, 어린 나이부터 혹독한 훈련을 견딘 채 후원자에게 의지해 생활했습니다. 화려한 오페라 극장과는 달리, 이들의 현실은 연습과 생계가 끊임없이 뒤섞인 삶이었지요. 드가는 바로 그 간극을 누구보다 냉정하고 정확한 눈으로 포착했습니다.
〈발레 수업〉 속 소녀들의 표정은 그래서 더 진솔합니다. 팔의 각도는 조금씩 어긋나 있고, 어깨에는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그대로 드러나지요. 벽 쪽에서는 친구와 잠시 속삭이며 미소를 짓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드가는 이런 순간들을 꾸미지 않았습니다. 순간을 있는 그대로의 빛으로 담아내며 노력과 기다림의 시간을 차분한 시선으로 담아냈습니다.
한 소녀가 말해준 현실의 무게
〈발레 수업〉이 여러 소녀가 함께 만들어낸 연습실의 긴장과 리듬을 담았다면 〈14살의 작은 무용수〉(1880)는 시선을 오직 한 소녀에게로 모읍니다. 그의 눈은 이제 연습실 전체가 아니라 소녀 한 명의 몸짓과 표정에만 머뭅니다. 오르세 1층 조각 갤러리에서 이 작품 앞에 서면 유리 진열장 속 소녀가 막 연습실에서 걸어나온 듯한 인상을 줍니다.
실제 소녀의 키와 비슷한 99cm 조각은 허리는 꼿꼿한데 발끝은 불안하게 땅을 딛고 있습니다. 두 손을 뒤로 모은 자세에는 긴장과 순종이 함께 배어 있습니다. 살짝 치켜 든 턱에는 사춘기 특유의 불안과 막 피어오르는 자신감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 조각은 처음 공개되자, ‘너무 현실적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논란 한가운데 서게 되었지요. 1881년 인상파 전시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밀랍 조각에 실제 튀튀와 리본, 가죽 슈즈까지 입힌 모습이 지나치게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조각은 대리석처럼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드가는 가난한 연습생의 현실을 그대로 전시장 한가운데 올려놓았습니다. 그 솔직함은 그 시대엔 충격이었지만, 지금은 드가라는 예술가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진실이 되었습니다.
모델은 파리 발레학교의 연습생 마리 반 괴템(Marie van Goethem)입니다. 벨기에에서 건너와 당시 파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소녀였지요. 그의 가족은 재봉과 무용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집안이었습니다. 드가는 이 소녀를 ‘완성된 발레리나’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매일 쌓아가던 과정 그 자체를 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조각은 드가 사후에 청동으로 주조된 버전입니다. 하지만 튀튀와 리본에는 여전히 실제 천이 덧입혀져 있어 그 시절의 공기와 질감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드가의 발레 그림을 한데 모으면 하나의 서사가 완성됩니다. 〈발레 수업〉에는 집단 속에 흐르는 규율과 연습, 긴장과 짧은 쉼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 〈14살의 작은 무용수〉에서는 한 개인이 무대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순간이 보이지요.
드가는 발레를 그릴 때 화려한 몸짓이 아니라, 그 몸짓을 만들어낸 수많은 땀방울과 버팀의 시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화려한 파리의 무대가 순간 사라지고, 연습실의 냄새와 마룻바닥의 온기, 지팡이가 바닥을 건드리는 가벼운 울림까지 들려오는 듯합니다. 〈발레 수업〉의 소녀들도, 〈14살의 작은 무용수〉도 그렇듯 우리 역시 각자의 무대 뒤에서 묵묵히 과정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드가는 이 두 작품을 통해 화려한 무대보다 그 무대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예술은 늘 멋진 해답을 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 있도록 작은 창 하나를 열어줄 뿐입니다. 오르세에서 드가의 그림 앞에 서 있던 그 겨울의 공기처럼, 그 창은 지금도 우리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방향을 조용히 비춰 줍니다.
오마이뉴스 화요일 연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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