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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우 Oct 17. 2024

허먼밀러의 역습

HP 부족 경고

7월의 에피소드. 건강과 돈을 교환하는 직장인


어느 날 복지팀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복지팀] 건강관리 프로그램 안내 및 사후관리 확인 요청

2주 전 받은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으니 회사의 관리 프로그램을 예약하라는 친절한 안내 메일이었다. ‘앗, 올해도 변함없이 몸이 썩어 있구만?’하며 대충 요약만 읽고 Onedrive 어딘 가에 던져버린 내 검진결과지를 나보다 더 꼼꼼히 읽어 주신 분이 계셨다니,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상담을 예약했다. 


상담일, 나는 평소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블루 라이트 차단 안경을 추켜올리며 3층 건강 관리실의 문을 두들겼다.

    나: “저.. 오늘 상담 예약을 한…”

    쌤: “어서 오세요! 계단으로 올라오셨을 테니 우선 5분 정도 쉬셨다가 혈압 먼저 잴까요?”

    나: “넵!” (흠, 역시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는군. 그 정도 검진 수치가 나오려면 3층 정도는 엘리베이터를 꼭 타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말이야...)


하지만 난 최소한의 움직임은 하고 사는 척, 선생님 말씀대로 이것저것 진행했다. 그리고 일대일 상담실로 들어갔다. 이어진 상담을 요약하면 대충 아래와 같다.

    쌤: “아니 사우 님, 더 이상 이렇게 사시면 안 됩니다. 대체 수치가 이게 뭐예요.”

    나: “하지만 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달리 라이선스를 가지지 못한 직장인 인걸요. 건강 정도는 포기해야 월급을 받을 수 있어요.”

    쌤: “저희 모두 건강과 행복을 위해 돈을 버는 거잖아요! 저희 하루에 최소 30분은 걷기로 해요.”

    나: “전혀요. 전 약간의 성취감과 더 약간의 월급을 위해 건강을 포기하며 살아왔습니다. 역시 지금이라도 기술을 배워야 할까요?”

    쌤: “쓸데없는 얘기하지 마시고, 하루에 플랭크 30개랑 걷기 30분으로 가볍게 시작해 봐요”

    나: “방금 은근슬쩍 운동 하나 더 추가하셨네요.”

    쌤: “됐고, 이제부터 짠 음식, 고기, 액상과당, 커피 및 이것저것 지금까지 좋아하셨던 것들 다 금지입니다. 아프고 끊으실래요. 지금 끊으실래요?”   

    나: “저의 30여 년의 인생을 너무 쉽게 부정하시네요. 저는 대체 무엇으로 살란 것입니까….”




[허먼밀러의 역습]


    이직 후 확연하게 바뀐 것 중 하나가 건강 상태다. (당연하지만 안 좋게 바뀌었다) 

    물론 IT 노동자들은 다들 VDT 증후군을 앓고 있다. 이건 업계를 들어오며 각오한 부분이고, 워낙 건강에 무심한 성격이라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불에 들어가면 여기가 사우나려니, 물에 들어가면 워터파크려니 하던 나였는데... 이런 나까지도 ‘이건 재앙이다!’라고 느껴진 고장이 발생했다. 그건 바로 허리 디스크!


    입사 후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갑자기 허리와 오른쪽 골반 근육에 극심한 통증이 생겼다. 

당시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이 일했기에 너무 증상이 심하면 일을 잠시 멈추고 병원에 다녀왔다가 다시 일하곤 했다. 반년 이상을 앉아도 서도 누워도 힘든 상태로 지냈고, 자다가 나도 모르게 움직이면 그 통증에 몇 번씩 잠이 깨기 일쑤였다. 영화 한 편을 극장에서 보기 위해서는 최소 두 번은 중간에 일어나 뒤에 서 있어야 했고, 조금만 오래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통증이 몰려와서 몇 분간 그 자리에서 골반을 두들겼다. 가장 곤란할 때는 버스에서였다. 30분 이상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하차 때 일어나면 몰려드는 통증에 바로 문까지 걸어가는 것이 끔찍할 지경이었다. 가끔은 일어났다 너무 아파서 몇 정거장을 더 가기도 했다.


    아무리 오래 앉아 일을 했다고 하지만, 왜 이렇게 급성으로 디스크가 생긴 건지 의아하던 와중, 몇 개월 후 입사한 인턴분이 갑자기 같은 증상을 겪으며 비밀은 밝혀졌는데! 


"지우 님! 이 허먼밀러 각도랑 높이 다 조정되는 거 아셨어요? 이 부분 이렇게 돌리면, 의자가 뒤로 이렇게 넘어갈 수도 있어요!”


    아아.. 당했구나, 허먼밀러의 역습을..! 

    허먼밀러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회사가 잘 나간다는 것의 증표, 회사가 직원의 척추까지 신경 쓴다는 복지의 상징, 의자계의 샤넬이 아니던가. 하지만 원래 맞춤복도 그 몸에 맞아야 편한 법. 나도, 그 인턴분도 회사에서 지급된 그 상태 그대로 의자를 쓴 것이다. 자기 몸에 맞춰 여러 부분을 조정하지 않으면 그저 직각 나무 의자와 다를 바 없는 이 최고급 의자를 말이다. 여기에 앉아 하루 13시간 이상 일해 왔으니, 노쇠한 나의 척추는 물론이고 그 인턴분의 어린 척추도 버티지 못했던 것.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인턴분은 다친 허리와 더 크게 다친 마음을 안고 홀연히 잠수 퇴사를 했다. 사실 난 그 인턴분의 직무 적합성을 낮게 보았고, 당사자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생각했음에도 그 퇴사는 오랜 시간 충격으로 남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함이 컸다. 그분은 나에게 자주 회사 생활에 대한 상담을 청했는데, 난 단 한 번도 응하지 못했다. 정말 바빴기 때문이다. 사내 카페에서 콜라 한 잔만 함께 마셔주면 안 되냐고, 인턴인데도 자기가 사겠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매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15분 정도 일을 멈춘다고 대단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렇게 매일 전쟁하듯 일을 했다. 한참 어린 후배가 짧은 상담을 요청하는데도 여유를 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10년 후에는 저 선배와 같이 살아야 하는 걸까?' 하며 한 번이라도 자신의 미래를 나에 비추어 상상하진 않았을까? 


    내 마음이 좀 더 여유로웠다면 이직한 후 새로워진 환경에 호기심을 가지고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분께 허먼밀러 맞춤 세팅하는 법을 알려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럼 그분이 여러 일로 마음은 다치셨더라도 허리는 지키셨을 텐데. 아니, 최소한 1,500원짜리 콜라 한 캔을 마시며 15분의 여유는 경험하셨을 텐데… 


    그 이후, 난 고가의 캐시아이템 ‘밸런스 쿠션’을 의자에 장착하고 용케도 버텨냈다. 그 인턴 분이 떠난 자리는 머지않아 다른 신입 직원이 채우셨지만, 매 번 새로운 분을 모실 때면 그 긴장한 뒷모습들에서 그때의 후회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팀의 신규 입사자 멘토가 된 첫날, 멘티에게 이렇게 가이드를 드렸다.


 “오늘은 회사에서 온라인 교육을 몇 개 들으라고 할 거예요. 그거 들으시고 이 허먼밀러 몸에 맞춰서 세팅하고 퇴근하시면 됩니다. 교육은 다 못 듣더라도 허먼밀러는 꼭 세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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