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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우 Oct 17. 2024

멈춤 버튼이 고장 난 영사기

HP 부족 경고

고장 난 영사기


    『일리아스』를 쓴 호메로스는 '잠은 눈꺼풀을 덮어서 선한 것이라고, 악한 것이라고, 그래서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지. 그리고 잘 자는 게 주특기인 나를 길러야 하셨던 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셨지. “만에 하나 네 인생이 망한다면, 그건 잠 때문일 거다.”

 

    요지는, 난 잠을 매우 잘 자고 잠을 잘 자면 대부분 힘든 일도 잘 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불면증이 찾아올 줄이야?


    나의 불면증은 몇 시간마다 계속 깨는 것으로 미약하게 시작되어, 아무리 피곤해도, 심지어 새벽 2시에 퇴근한 날에도 잠에 들지 못하는 수준까지 창대해져 갔다. 오늘 마무리하지 못한 일, 내일 해야 하는 일 등등.. 눈을 감으면 업무에 대한 의미 없는 고민들이 머릿속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 새벽에 고민해 봐야 하등 쓸모없다는 것을, 막상 내일 출근하면 별일 아닐 것이란 것을 알면서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마치 ‘멈춤’ 버튼이 고장 난 영사기 같았다.


   불면을 이기기 위해 나름 여러 시도를 했다.

하나. 개인 명상 : 그냥 1시간째 가부좌를 틀고 앉아 똑같은 고민을 하는 나를 발견할 뿐

둘. 집단 명상 : 우리나라는 명상 테마의 사이비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셋. ASMR : 간지러운 소리를 들으며 업무 생각을 하는 이어폰을 낀 내가 존재할 뿐

넷. 운동 : (운동을 해봐야 뭐 얼마나 했겠냐만) 퇴근길의 운동은 내 뇌를 각성시켰을 뿐


    결국 병원을 찾아가 수면제 처방을 받았고, ‘아 오늘 못 자겠는데?’ 느낌이 오면 바로 먹었다. 수면제 부작용에 대한 걱정과 다르게, 적당한 시간에 생각이 끊어지는 것에 뇌가 적응했는지 서서히 불면도 사라졌다. 아아 이 현대의학의 위대함이란, 역시 요즘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 의대를 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니까.


물 먹은 대형 곰 인형


    그런데 곧 주말 과수면이 찾아왔다. 토요일에는 모든 업무 긴장이 풀려서 인지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수준으로 몸이 무거웠다. 마치 탈수를 거치지 않은 세탁한 대형 곰 인형이 된 것과 같은 상태였다. 머리는 어지럽고 몸은 무거워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잠만 잤다. 그냥 '피곤하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주말에는 온몸에 독이 퍼져있고, 잠을 자야만 그 독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토요일에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길어도 5시간이 안되었고, 일요일에는 오후 1시까지 잠을 잤다. 그 정도를 자야 그 알 수 없는 독이 빠진 느낌이 들었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 3시까지 회사를 가는 것이 나의 주말 루틴이었다.


    회사의 복지를 살뜰히 챙겨 먹는 나는, 이 문제로 회사 심리상담 프로그램도 꾸준히 찾았다. 포근한 숄더를 두르고, 머그잔 안의 차를 마시며 나를 맞이한 상담가 선생님은 1시간 동안 내 모든 질문과 대답을 하나의 문장으로 대응하셨다. “음… 그래서 어떤 생각이 들어요?” 

    '이젠 저도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어쩌죠. 선생님, 이제 저는 그저 선생님 숄더가 따듯하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목도 좀 마르네요. 다음에는 텀블러도 가져올게요.' 결국 몇 차례 상담을 통해 나의 수면장애는 잔잔한 대화 정도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너스로 또 다른 깨달음도 얻었다. 심리 상담가라는 직업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는 것! 한 가지 문장만 사용해서 일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란 말인가? 진지하게 상담심리학 전공한 지인에게 내 은퇴 후 진로로 이 직업이 어떨지에 대해 직업 상담까지 받았을 정도로 당시 난 꽤 진지했다.


    허망하고도 놀랍게 이 과수면은 팀 내 업무 로테이션 이후 자연스럽게 개선되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산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상태가 이러하니 업무량을 조절해 달려든 지 하는 합리적인 제안을 회사에 했다면 조금이라도 짧게 괴로웠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당시의 내가 그런 제안을 논리적인 근거와 함께 전달할 수 있는 상태였을까 하면, 그것도 아니었을 것 같다. 당시의 난, 상황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노오오력을 하며 매일 정신승리를 했다. '괜찮냐'는 질문에는 무조건 괜찮다고 대답했었으니까.


    운 좋게도 난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타의 환경이 변 상황을 벗어났다. 하지만 운이 나쁜 어딘가의 사람들은 그때의 나처럼 매일을 버티고 있지는 않을지, 몸의 경고 신호를 실시간으로 받으면서도 본인의 정신력 부족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지는 않을 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럼 곧 입이 씁쓸해진다.

    사람은 스스로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니 주변의 관심 새삼스럽지만 정말 중요하다. 작지만 지속적인 애정 만이 그 사람에게 어떤 개선의 여지를 떠올리게 하는 자극을 주지 않을까? 당신은 전혀 괜찮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틈을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 독감에도 출근한 막내 직원에게 작은 소리로 이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어? 아직 출근 체크 안 하셨네요 그럼 그대로 집에 들어가 주세요. 사람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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