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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두뇌를 넘어: 데미스 하사비스가 연 미래

다큐멘터리 'The Thinking Game' 리뷰

by 김원상

https://youtu.be/d95J8yzvjbQ

2016년 이세돌과의 역사적인 대국으로 이름을 알린 알파고, 그리고 알파고를 만든 주인공으로 데미스 하사비스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막연히 구글에서 인공지능 전문가나 딥마인드라는 회사를 이끄는 대표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전통적인 화학자도 아님에도 2024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기에 그의 삶의 경로와 정체성이 궁금해졌다. 그런 호기심을 긁어줄 다큐가 무료로 공개되어 소개한다.


데미스 하사비스는 4살에 체스를 시작해 13살에 국가를 대표할 정도의 체스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보드게임과 비디오게임를 매개로 프로그래밍에 눈을 떴으며, 천재성을 발휘해 케임브릿지 17살에 합격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늦췄고, 갭이어(?)를 유명 게임 회사 불프로그에서 일했고, 사내에서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인공지능에 대한 개발 의지가 확고했다. 이에 케임브릿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다시 게임사인 라이온헤드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어릴 때 블랙&화이트 많이 했는데, 하사비스가 AI 디자이너였다니!) 게임사 경험을 뒤로 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인지신경과학으로 공부하며 인공지능 연구에 전념한다. 그리고 졸업 후 마음 맞는 지인들과 딥마인드를 창업한다.


데미스 하사비스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 'The Thinking Game'은 천재 신화의 익숙한 기원을 비틀며 시작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낸 ‘천재’였지만, 사실 이런 천재성 자체만으로는 특별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는 비슷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다큐가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서 갈라진다. 평범한 천재와 시대를 움직이는 천재의 차이는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능력을 ‘연결하는 방식’에 있다. 그러니까 전통적 천재가 '내 훌륭한 두뇌로 모든지 해낼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면, '이 좋은 두뇌로 다른 더 좋은 머리들과 함께 협업하고 공동의 목표를 꿈꾼다면 혼자 해내는 것보다 더 큰 성취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게 작금의 천재다.


하사비스가 좋아하던 체스를 내려놓는 장면은 그 전환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는 한 개인의 두뇌가 아무리 탁월해도 도달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체스 대회에서 마주한 그 감각—한 명의 두뇌가 아닌 여러 두뇌가 연결될 때만 등장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훗날 인공지능을 설계하는 그의 사고틀이 된다. 창의성은 고독한 천재의 머릿속에서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의 장 안에서 ‘창발’한다는 통찰이다.


large_THINKING_GAME-Clean-16x9-01.png 단백질 접힘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2024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하사비스. 그러나 그에겐 노벨상보다 가장 큰 업적이 아닐 것 같다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독점과 시장 지배를 성공의 표준으로 삼아왔다. 이런 시스템은 타인과의 연결·공유·협업보다는 배타적 경쟁을 강화해 왔고, 하사비스 같은 마인드셋이 싹트기 어려운 구조였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는 이 규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수억 개 뉴런이 서로 연결되며 구조적으로 ‘소통’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신경망처럼, AI 자체가 연결 없는 진보를 허용하지 않는다. 수조개 트랜지스터들이 빛의 속도로 연결을 주고받을 정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덕에 하사비스의 아이디어는 현실에 모사될 수 있었고 말 그대로 시기가 잘맞물렸다. 하사비스가 실리콘밸리에 가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그러지 않았던 것도 런던에서 인적 연결망이 더 잘 작동했기 때문이다. 다큐는 런던의 교통과 철도망을 통해 이동하는 하사비스의 모습을 여러 차례 잡은 것도 단순한 장치는 아니었을 것.


극의 정점은 하사비스가 알파폴드를 통해 단백질 접힘을 정확히 예측해내며 구조생물학의 지평을 단숨에 다시 써버린 순간이다. 오랜 세월 과학자들이 풀지 못하던 난제를 기계학습이 단번에 뛰어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경이롭지만, 진짜 클라이맥스는 그 다음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2억개 넘는 단백질 구조와 알파폴드의 예측 능력이란 성취를 오픈소스로 공개하자고 제안한다. 주변에서는 이제야 사업성이 보인다며, 기술을 둘러싼 ‘독점의 향기’를 포착하려는 손길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하사비스의 선택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기술의 가치는 소유가 아니라 순환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한 연구팀이 움켜쥐고 있을 때보다, 전 세계 연구자들이 함께 다룰 때 더 빠른 발견이 일어나고 더 넓은 인간의 이해가 열린다는 직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치 잠긴 방 안의 촛불 하나보다, 열린 광장에서 나누는 불꽃이 훨씬 더 넓은 공간을 밝히는 것처럼 말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오픈소스에 접속해 알파폴드의 성취를 활용하기 시작하는 순간을 본 후에야 하사비스의 안도와 만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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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혁신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 방식의 전환에 있다. 더 넓게 연결하고, 더 자주 협업하며, 더 많은 두뇌를 모으는 것이 앞으로의 기회이자 유일한 길이다. 다큐는 하사비스의 사례를 통해 조용히 말한다. 미래는 뛰어난 개인이 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잇는 네트워크가 여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하사비스의 관점에 가중치를 준다면, 인공지능이 드리우는 회의론적인 미래관이 조금 더 불투명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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