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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선오 May 13. 2022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

- 보따리 선생님 이야기

 햇빛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무엇을 입을지 고민했다. 이제 열 살인 소녀들은 제법 내 옷에 관심이 많다. 매번 주문이 달랐다. 


 “선생님,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와주세요.”


 순간 내 머릿속으로 내 옷장 속 옷들을 재빠르게 찾아보았지만 아무래도 분홍색 원피스는 없다. 분홍색 원피스가 없다고 하니 이번에는 분홍색 티셔츠라도 입고 와 달라고 한다. 싫다고 할 수도 있고 그저 아이들의 변덕이거니 하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다음에는 내가 약속을 지키라고 말할 수가 없다. 약속의 중요성은 어른이 먼저 실천하고 가르쳐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들과 약속한 다음 주, 나는 분홍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아이들에게 약속을 지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그저 내가 약속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한다. 그리고 온갖 낯간지러운 미사여구를 덧붙여 칭찬해 준다. 나는 그 칭찬이 고맙고 또 기뻐 아이들의 주문이 없는 날에도 더 옷을 신경 써서 수업에 가고는 했다. 


 물론 나의 이런 노력이 아이들에게 항상 통하지는 않는다. 어느 날은 안 예쁘다는 뼈아픈 소리도 듣고, 어떤 때는 아줌마 같아 보인다는 폭격까지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요청에 계속되는 나 혼자 패션쇼는 늘 재미있다. 


 어느 날, 나를 제일 따르고 좋아하는 유라가 나비 느낌이 나는 옷을 입고 와 달라고 주문을 했다. 도무지 나비 느낌 나는 옷이 뭔지 몰라서 유라에게 힌트를 달라고 하니 나비가 좋아할 만한 옷이란다. 


 어른들의 상상력이란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우주에 떨어진 작고 하찮은 운석 같은 것이라 내가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겨우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였다. 나름 예쁘다는 칭찬을 기대하며 수업에 갔더니 유라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선생님, 왜 할머니 원피스를 뺏어 입었어요? 나비 느낌이 나는 옷 입고 오라고 했는데.”


 가끔 아이들의 말은 옛날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것 같은 환상을 느끼게 한다. 말 그대로 띠용! 하는 상황이랄까. 나중에 몇 번이고 다시 유라가 원하는 옷에 도전했지만 아무래도 내게 나비 같은 느낌은 역부족이었다. 


 또 유라는 가끔 내 뒤로 몰래 와서 내 긴 머리를 양 갈래로 손에 잡고는 선생님이 이렇게 묶고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간절한 눈빛으로 쏘아댔다. 아무리 아이들을 사랑하는 나지만 이 바람만은 들어줄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마스크를 방패 삼아 한번 묶고 와 볼까 싶지만 눈가 가득한 주름을 들키는 순간 어떤 소리를 들을지 참담했다. 유라의 간절한 소망에도 그저 “아이고, 선생님은 양 갈래머리는 안 어울려요.” 라는 말로 서운해하는 아이를 달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이가 한마디 거든다. 


 “야! 선생님 나이에 그런 머리하고 다니면 욕먹어!”


 정말 촌철살인이다. 맞다. 내가 그런 머리를 하고 다니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가끔 엄청나게 직설적이고 이성적이며 냉정하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화법에 방심한 어른은 꽤 따끔한 상처를 입는다. 


 햇빛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매번 옷에 신경을 썼지만 달빛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3학년과 1학년 학생의 차이일까? 아이들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자르고 아줌마 같은 퍼머를 해도 도무지 알아보는 녀석이 없다. 물론 처음 나를 발견하고는 마스크를 쓴 이 아줌마가 우리 선생님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는 있었지만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 선생님이구나’ 하고는 그냥 넘어가 버렸다. 무관심한 아이들의 반응이 다소 서운했지만 다행히 내가 무엇을 입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녀석들 때문에 편하기는 했다. 


 그리고 사실 1학년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면 옷에 더 신경을 못 쓰게 된다.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있을 때 내가 눈높이를 맞춰 무릎을 꿇으면 아이들은 발을 까딱거리다 결국 내 바지에 실내화를 문지른다. 또 가끔은 손을 닦고 와서 내 옷에 천연덕스럽게 물을 닦기도 한다. 안 된다, 하며 단호하게 혼내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미안해하는 그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보면 진심으로 화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 있으니, 바로 스티커다. 아이들의 수학 문제집에는 일명 붙임 딱지라고 하는 스티커 있는데 아이들은 수업에 쓰고 남은 스티커를 전부 떼서 여기저기 붙인다. 


 아이들이 스티커 붙이기를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바로 내 옷이다. 아이들은 내가 떼기 힘든 등 뒤를 꾸며주겠다며 각종 알록달록한 스티커로 내 옷을 꾸민다. 결국 수업이 끝나고 나면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겉옷을 벗어 혼자서 스티커를 떼야지 집에 갈 수 있다. 웃으며 그 스티커를 떼다 보면 아이들의 그 천진한 웃음이 생각나 화도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아이들의 관심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무슨 옷을 입고 가도 아이들은 그저 웃으며 나를 반긴다는 것을. 그때 입은 그 옷이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라는 것을 나는 정말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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