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는 어느 신용평가 회사의 기업정보센터였다. 전공을 살려 기업 재무팀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력직을 요구해서 취업이 좀처럼 되지 않았다. 마침 이 회사는 회계 전공자이면서 신입 경력 상관없이 여러 명을 채용하고 있었고, 일반 회계 업무가 아닌 회계 데이터 처리 업무였기에 신선해 보였다. 3개월 수습이 끝나면 계약직 형태로 근무하는 거였는데, 거쳐 갈 회사라고 생각했기에 ‘계약직’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원하는 연봉과 복지를 가진 회사는 취업이 되질 않았다. 당장 취업을 못하는 것보다 남자친구와의 이별이 더 끔찍하였다. 경력도 쌓고 데이트 비용을 벌자 싶었다.
업무는 신용평가를 신청한 기업이 재무제표 등의 서류를 제출하면 재무제표가 올바르게 들어왔는지 검수하고, 당사 신용평가 모형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일이었다. 회계를 모르면 어려웠지만 알고 배우면 어렵지 않은 업무였다. 전반적으로 신용평가 기초 데이터를 형성하는 작업이었다. 힘들었던 건 서류 검수 과정 중에 ‘잘못된’ 재무제표를 입수하였을 때 회계 담당자 혹은 세무 대리인과의 통화하는 일이었다. 회계 재무제표는 각 데이터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논리가 숨어 있는데 간혹 숫자가 잘못 들어간 재무제표가 있곤 하였다. 담당자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하면 가끔 ‘자존심’ 부리는 상대와 통화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자료를 넘겨 놓고 ‘네가 알면 얼마나 알아?’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숫자만 보면 될 줄 알았는데 모르는 이로부터 ‘빈정 상함’까지 받아내야 했다.
다행인 건 상사가 과한 업무를 주거나 엄격하게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자기 할 일만 하면 되는 ‘계약직’ 특성 때문인지 기본적인 선을 넘지 않는 이상 터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업무 특성상 여자가 많을 거라고예상은 했지만 팀원, 팀장, 상위 부서, 심지어 센터장까지 모두 여자였다. 한때는 공대생이었기에(회계세무 전공으로 전과한 것) 찐 ‘여자’들만 있는 곳이그리 편치 않았다. 동기들은 나보다 한두 살 터울의 동생들이라서 편하게 대할 수 있어 괜찮았는데 (가끔은 그들도 불편할 때가 있지만) 위 여자 상사에겐 상사라고 해서 그냥 어려워하는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어색해했다.
나조차도 같은 여자임에도 여자들을 꺼리게 된 과거가 있었다. 대학교를 재수해서 들어갔는데 내가 빠른 생일이라 동갑인데도 한 학번 위 선배를 깍듯하게 모셔야 하는 분위기 때문에(안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여자 선배’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고 난 분명 인사를 했는데 유독 언니들만은 인사 왜 ‘안 하냐고(했다고요)’ 핀잔받은 적이 있어 없던 언니 공포증이 생겼다. 특이한 점은 똑같은 톤으로 인사를 해도 오빠들은 그런 트집을 전혀 잡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거 기억 때문에 나도 모르게 여자 상사들과는 말을 덜 섞게 되었다. 대인관계에서 노력을 하는 편이나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는 성향도 아니다. 가식 떨며 알랑방구 뀌는 사람들을 보면 치를 떠는 쪽에 가깝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있어 좋아하는 동기들에게만 과한 친밀함을 발휘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기들도 나를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입사 첫 주는 직무 이론 교육을 받았고 2주 차부터 실무에 투입되었다. 실무 교육 첫날, 드디어 팀장과 선임들을 처음 보게 되었다. 한 명씩 선임들이 1대 1로 전담 마크하여 모니터 앞에서 교육을 해주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옆에 앉은 선임은 “점심 맛있게 먹어요” 하며 사라졌다. 팀장은 다른 팀의 팀장과 이미 나갔고 상사도 다른 팀원과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그때 동기들끼리 눈이 마주쳤는데 어떻게 점심을 먹을지 서로 보며 난감해했다. 팀원끼리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치 ‘친하지 않으면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라는 공식이 적용된 것 같았다. 그렇게 나와 동기들은 강제로 ‘같이 밥을 먹는 무리’가 되었다.
며칠 더 일을 해보니 누구는 누구랑 친하고 안 친하고가 극명하게 보였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업무 외적인 대화는 거의 하지 않은 듯하였다.업무 자체가 협업해서 하는 일이 아닌 개인에게 주어진 할당량만 처리하면 되어 친해질 기회도 없어 보였다. 자기 무리 여자 사람들만 끼리끼리 뭉쳐 지냈다. 무리가 없으면 외톨이가 되는 느낌이랄까. 애초에 혼자 입사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사람들을 보면 서로 웃고는 있지만 다른 무리에겐 특유의 삭막함이 있었다. 상사 잔소리도 없고 팀원들과 업무적으로 충돌할 일이 없어일하는 데 별 '무리'없이 편하였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있고소속감이 적어 회사가 회사 같지 않았다.
입사 동기는 나 포함 세 명이었는데, 한 명은 이 분위기를 적응을 잘 못한 건지 어쩐 건지 연유도 모른 채 2개월 뒤 퇴사하였다. 얼마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입사 시기가 얼마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남은 동기와 나는 새로 입사한 직원의 ‘무리’가 되어 주었다. 여기에 원래 있던 동기 한 명이 다른 팀에 친구가 있어 그 친구까지 넷이서 가깝게 지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서로가 외롭지 않은 밥 동료가 되어준 것이다.